2017년 8월 27일은 본인이 20여 년간 서울생활을 접고 고향 진도 새섬으로 낙향하는 날이다.
버릴것은 다 버렸지만, 그간의 작가생활 8년동안 쌓아 온 때묻은 짐들이 그래도 1톤차 가득이었다.
혹자는 "왜 지금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데 시골외지로 내려가느냐" 반문도 했지만, 나의 깊은 속내를 모른채 꺼내 든 말이다.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아직도 혼자인 나에게는 여든일곱의 어머니가 언제나 아른 거릴 수 밖에 없었다.
다른 가족이야..건사할 자녀들이 있고 직장생활을 섬에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에 귀향하고 싶어도 못하는 현실속에서 본인만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쉽게 낙향을 선턕할 수 있었다.
부모가 살아계실때 봉양하는게 자식된 도리임에는 어느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살아 생전에 어머니와 함께 말동무도 해드리고, 어머니의 손발이 되어 주는것!
그게 가장 큰 효의 기본이 아닐까 싶다.
돌아가시면 후회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이 고향으로 머리를 돌리게 한 주된 이유중 하나다. 작가일이야.. 어디든지 상관이 없다는 게 나의 지론이었고, 낙향을 결정하고 시골로 내려오니 도시생활의 긴장과 팍팍함이 눈녹 듯이 사라지고 행복한 시간만이 어머니와 나에게 존재할 뿐이다.
시골 낙향 3일째 되던 오늘 오후 4시경.. 마을 이장께서 바다 일을 끝내고 오셨는지 숨 가쁘게 마을회관의 마이크를 잡았다. "노인회에서 마을 어르신들께 따뜻한 저녁밥상을 회관에 준비했다면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5시까지 저녁식사를 하러 오십시오"라고 안내방송을 하셨다.
어머니는 힘든 육신을 이끌고 마을회관으로 향했고, 20여분도 채 안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시면서 "막두야! 막두야!!" 연신 두번을 부르셨다.
떡과 전복죽을 검정 비닐봉지에 곱게 싸가지고 오셨던 것이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평소 때는 거동이 불편해 외출을 자주 안 하시는 편인데 오늘은 막둥이를 생각해서인지 자신은 제대로 드시지도 않고 음식이 식기 전에 빨리 집으로 서둘러 가지고 오셨던 것.
어느 누구의 부모인들 안그랬을까?마는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다 큰 성인이 되어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어머니와 나는 전복죽과 떡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육자배기를 부르며, 기분 좋은 저녁을 맞이하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