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살아생전에 못다 한 효를 실천하는 게 자식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라 생각했다. 돌아가신 후에 상다리 휘어지게 제사상을 차려드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고, 묘에 값비싼 묘비를 세우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생각은 언제나 내 마음속의 풍금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2017년 8월, 잘 나가던 직장을 과감히 정리하고 시골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내려왔을 때 어머니는 내게 “아들아! 내 나이 60 정도에 내려왔으면 했다”라고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어머니, 60이면 내 나이가 30대 초반에 직장생활 한참 해야 할 나이예요” 하며 함께 웃음을 자아낸 적이 있다. 그토록 어머니의 삶이 외로웠다는 것을 내게 말해주고자 했던 것 같다.
내가 고향으로 내려오기 전까지 어머니는 가을걷이가 끝나면 서울 큰누나 집으로 한 달 정도 쉬었다 시골로 내려오기를 몇 년 동안 계속했다.
2017년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 어머니께 “올 겨울도 서울 가실래요?” 하고 묻자, “미쳤냐.. 시골에 아들이 함께 있는데 뭐 하러” 어머니는 막내아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 생각하면 행복했던 것 같았다.
어머니는 국물이 없으면 식사를 못하시는 관계로 여름과 가을 내내 물고기를 잡아 맑은 탕을 끓여 밥상에 고깃국이 빠지는 날이 없도록 했다. 고기를 얼마나 많이 잡았던지 큰 고기는 냉동실에 보관을 해놓고 떨어지는 것을 미리 체크하며 어머니와 보낸 90일 동안 계속 이어졌다.
어머니와 3년을 함께 보낸다는 목표를 세우고 내려온 귀향 길은 3개월의 짧은 생활이 전부였다.
내가 어머니께 해드린 것은 풍족한 물질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눈높이에서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하게 모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의 운명에 대해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게 미천한 인간이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지 1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생각한 일은 짧은 3개월 동안이나마 어머니와 귀한 추억을 만들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지금도 큰 위안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