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 곳에
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더니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출처: 김원중의 ‘바위섬’ 노랫말 중에서)
1984년 광주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불려진 김원중의 '바위섬'은 40년이 흐른 시간 속에서도 5.18의 상흔을 안고 있는 가슴 절절한 노래로 가사 내용 중 바위섬은 '광주'를, 폭풍우는 '신군부'를 지칭한다고 한다.
당시 전남대에 재직 중이던 김원중은 시위대와 운동권과는 거리가 먼 먹고 노는 날라리 대학생이었지만 그들마저도 신군부의 폭거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공부보다는 노래를 더 좋아했던 김원중은 1980년 금남로 신군부와 시민군과의 참혹한 현장을 피해 비겁하게 도망쳤다는 이유로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것이 힘겨워한다는 회고의 글을 접한 적이 있다.
그날 이후 김원중은 광주를 위해 노래했다. 그의 노랫속 광주는 단순한 애향심의 문제를 뛰어넘어 한국 현대사의 뼈아픈 상처를 치유하고 피맺힌 십자가를 짊어지려 했던 80년 광주 젊은이들에게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 또 하나의 태그가 따라붙는 게 '달거리'공연이다. 2003년 북한 어린이들에게 빵을 주고 싶어 처음 공연을 시작한 이래로 지난 2018년 12월 31일까지 총 104회 공연을 마쳤다고 한다.
오랫동안 인권, 민주, 평화, 통일을 주제로 15년 넘게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저녁이면 '빵 만드는 달거리'공연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김원중은 불러주기만 기다리지 않고 직접 판을 벌리고 대중들을 찾아가 사람 냄새나는 공연을 자청했다.
김원중의 달거리는 곧 '희망'을 노래했다. 단지 희망은 내 가족, 내 나라만이 아니고, 북녘 동포들의 희망까지 포함되었다. 달거리의 순수한 뜻을 접한 관객들은 자발적으로 낸 기금 1억 2천여만 원을 평양의 어린이 빵 공장으로 보내기도 했다. 달거리 공연 안에서 비치는 순간만큼은 평화고, 통일을 만날 수 있다.
2015년 당시 광주에서 시민단체 일을 보고 있던 지인으로부터 받은 장문의 이메일은 이렇듯 김원중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신념의 히스토리였다.
그러면서 공연 포스터에 들어갈 '김원중의 달거리'를 써줄 것을 부탁했다. “힘 있고 거칠 것 없는 글씨 느낌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더 붙였다. 신념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김원중 씨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글씨는 과연 어떤 것일까?를 고민에 고민을 하게 되었다.
사람과 사물에 부여되는 글씨의 성격은 엄연히 다르게 표현된다. 단 한(一) 자를 쓰더라도 그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현재 전반적인 상황 파악이 우선이다. 그래서 글씨는 나에게 늘 어렵게 다가온다. 글씨의 형태, 느낌, 성격이 모두 다름의 철학은 붓을 들었을 때 곧바로 감지할 수 있다. 쉽고, 어려운 글씨도 있고 단 한 번에 썼는데 맘에 드는 글씨가 있는 반면, 아무리 많이 쓰더라도 맘에 들지 않는 글씨도 있다.
쉽게 꺾이지 않는 도도한 여인처럼, 결코 ‘쉬움’이라는 전제를 깔지 않는 글씨의 남다른 매력 덕분에 지금까지도 붓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