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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캘리그래피 석산 Jan 20. 2020

#26 자식들아! 너무 슬퍼마라


지난 2019년 6월 29일 새벽 0시 5분에 어머니(故강복덕 1932~2019)께서 여든아홉의 생을 마감했다.

끝까지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봤던 나는 더 이상의 눈물을 짓지 않았다. 평소 어머니는 나에게 "내가 죽거든 너무 슬퍼하지 마라'고 당부하셨다.


2017년 8월 27일, 20여 년의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얼마 남지 않았던 어머니의 삶을 편히 모시기 위해 돌연 고향 섬으로 내려왔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나의 판단은 옳았고, 홀로 계신 어머니께 후회 없는 선택을 했다고 지금도 스스로 자부한다.


옛집을 허물고, 그 위에 새집을 지어 어머니와 생활은 단 90여 일.. 3개월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머니와의 많은 추억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늘 객지에서 살다가 휴가철, 명절에 고향을 찾아와 며칠 쉬었다가 올라가는 날이면 어머니의 눈가에 눈물바람이 늘 일렁거렸고, 못내 아쉬움에 나 역시 어머니와 생이별을 해야 한다는 마음에 눈물을 지어야 했던 날들을 회고하면서 어머니는 "이제 헤어지지 않고 눈물도 흘리지 않아서 좋구나"라고 말을 했었다.


2017년 11월, 날씨가 조석으로 바뀌는 섬마을에 어머니는 그날도 밭에 앉아 지슴(雜草 '김'의 방언)을 메다가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만다.


"어이할꼬, 어이해"


한없이 어머니를 불러봐도 이미 어머니는 동공이 돌아간 상태였다. 도로변에 주차해 놓은 차를 몰고 밭으로 끌고 가 어머니를 간신히 뒷좌석에 뉘이고 비상등을 켜고 섬마을 면소재지 보건소로 향하는 길에 목포세째형한테 닥터헬기를 섬으로 급파 요청을 한 다음 어머니를 모시고 보건소로 도착했지만 뇌경색 발병, 발견 시점에서 이미 골든타임을 놓쳐버렸고 후조치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 후, 어머니는 더 이상 걸어서 고향집을 밟지 못했고, 1년 6개 여월 동안 병상생활을 하다가 죽음의 종착지 급성폐렴역에서 여든아홉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어머니 사후 첫 번째 대명절 설날이 찾아왔다.


평소 어머니 살아생전에 내게 말하셨던 "막 두야 내 막 두야, 죽어서도 내 막두를 잊지 못하겠다. 막두야! 내가 죽어도 너무 슬퍼마라"는 말이 늘 마음속에 남아 '자식들아! 너무 슬퍼마라'로 다시 옮겨 어머니 얼굴 형상과 함께 서각 글씨로 이번 설날 어머니 영전(靈前)에 바치려고 한다.   

설날 어머니 영전에' 서각작품을 바쳤다.

그동안 시간에 쫓기다시피 살아온 시간 속에 잠시 어머니를 잊고 있었다. 대명절 설날을 앞두고 어머니가 너무나 간절히 보고 싶어졌다. 지금도 동구 밖 버선 신은 채로 막둥이를 반겨줄 것만 같은 착각 속에 자꾸만 눈물이 앞을 가린다.

'자식들아! 너무 슬퍼마라' 서각작품(서각_ 최선동, 서체_ 석산)

오늘따라 가슴 아리도록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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