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한 잔의 차(茶)를 마시며

by 캘리그래피 석산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인생을 생각한다.

혀끝에 닿을 그윽한 향기

온몸의 찌꺼기를 씻어내며

못다 한 나들이의 끝을 생각한다.

이 안에는 화경(化敬)의 경지가 있고 청적(淸寂)의 세계가 깃을 친다.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인생을 생각한다.

돌은 돌의 재미가 있고 물은 물의 즐거움이 있다던

장자(蔣子)의 속마음이 얼비친다.

죽어서 끝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생의 경영과 수레바퀴가 오늘따라 먼지와 티끌로 사라진다.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인생을 생각한다.

저 혼자서 꿈틀대는 바다와 같이

그토록 짙은 향기와 매혹을 드리워

내 몸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출처: 권일송_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지난 6월 초 살아생전 어머니가 일구고 가꾸었던 밭 언덕 너머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인동초 꽃을 채취하러 갔었다. 비가 내린 다음날 인동초는 매혹한 향기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른 아침부터 꿀벌과 개미들도 꽃망울 주변을 맴돌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틀 동안 좋은 볕에 꽃을 말리기 시작했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 속에 꽃향은 은은하게 내 후각을 자극했다. 둘째 날에 하얀 꽃, 노란 꽃은 모두 탈색된 밤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인동초 꽃 예닐곱 개를 띄우고 찻물이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시간.. 꽃 향은 서실 묵향에서 매혹 향으로 덮고도 남음이었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음미했을 때는 말이 필요 없는 오랜 침묵의 시간이었다. 굳이 머릿속에서 구차한 새로운 표현의 말을 꺼내 들지 않아도 된다.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오래도록 마주 앉아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사람 냄새와 매혹의 차향이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미흣한 분위기는 절로 입 꼬리를 씰룩거리기에 충분했다.


한 잔의 차를 즐기며 감춰뒀던 마음의 문을 열고 도란도란 희망을 이야기하며 행복해하는 단 한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봤다.


다시 오늘, 한 잔의 차를 내리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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