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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캘리그래피 석산 Nov 14. 2020

제94화 철학하는 삶

젊은 날 독일 쾰른대학에서 철학, 교육학, 신학을 공부하였고,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30여 년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다가 얼마 전부터 목수로서의 인생 2막을 시작했다는 최성식(前 조선대 철학과 교수, 현 갤러리 休) 대표의 ‘철학하는 삶’이 궁금했다.       

철학자에서 목수로의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갤러리 휴' 최성식 대표   

인문학의 핵심에 철학이 자리한다. 대학에서는 여러 종류의 철학들을 접할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은 철학을 위한 철학, 또는 학문을 위한 철학이다. 다시 말해 명사로서의 ‘철학’이다. 아쉽게도 이러한 이론으로서의 철학들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는 너무도 먼 거리에 있다. 때문에 철학은 철학을 전공한 자들의 전유물로 전락되었고 상아탑에 갇혀 버렸다. 철학이 중요하다고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삶과 유리된 철학은 일반 대중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사실 인문학의 위기는 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삶과 유리되면서 대중과의 소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1차적 책임은 인문학자들에게 있다.  


철학이란 본래 일상적인 삶 안에서 태어난 것이다. 삶을 보다 의미 있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 우주 삼라만상, 자연, 절대자, 인간, 인간의 삶, 인간관계, 이별, 죽음 등에 관해 궁극적인 물음을 제기하였고, 이 물음의 답을 찾고자 고민하고 사유했던 결과로 태어난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하는 삶’의 결과물로서 명사로서의 ‘철학’이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명사로서의 ‘철학’이라는 개념을 동사로서의 ‘철학하다’와 구분하여 생각해야 한다. 일상적인 삶 안에서의 ‘철학하다’에 의해서 이론으로서의 ‘철학’이 정립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립된 철학은 다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철학으로 발전된다.   

    

그럼 동사로서의 ‘철학하다’란 무엇인가?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늘 깨어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일상적인 리듬에 갇혀 습관과 타성에 젖어 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덧 습관과 타성이 자신의 주인이 된다. 결국 무관심, 무감각한 상태에 빠져든다. 무관심은 정신적으로, 무감각은 육체적으로 잠들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매사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삶을 ‘철학이 없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자들은 많은 문제들이 자신의 주위에 산적해 있음에도 그 문제들을 문제로 직시할 수 있는 안목이 없어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 문제를 문제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 이들의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무관심과 무감각으로부터의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철학하다’의 첫 번째 단계이다. 


무관심과 무감각으로부터 벗어 나왔을 때, 자신의 주위에 산적한 문제들을 비로소 문제로 인식하게 된다.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이 제거된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하다’의 두 번째 단계는 ‘문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 문제가 없다면 삶 자체는 너무나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이다. 삶의 재미는 알콩달콩한 문제들에서 연유되기 때문이다. 행복도 문제가 없어 행복한 것이 아니고, 문제가 있음에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행복한 것이다. 우리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게 될 때, 비로소 그 문제에 관하여 질문하게 된다. ‘왜 하필 그 문제가 나에게?’ ‘그 문제의 원인이 무얼까?’ ‘해결책은?’... 이와 같이 질문은 문제 인식을 한, 즉 깨어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이러한 질문은 ‘철학하다’의 세 번째 단계가 된다. 


일반적으로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 질문한다. 그렇지만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질문할 수 없다. 질문 잘하는 사람을 보면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거나 무언가를 꾸준히 연구하는 사람이다. 질문은 결국 알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자신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특정 부분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 점에 관하여 정확히 질문을 할 수 있다. 어떤 중대한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자 고민하는 사람은 눈앞에 살짝 스치는 것에서도 해결책을 잡아낼 수 있다. 또한 자신의 마음속에 질문을 품고 살다 보면 어느 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문제가 해결되어 있게 된다. 이렇게 늘 질문하면 산다는 것은 깨어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서 질문을 받게 되면,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선 고민한다. 다시 말해 질문을 통해서 사고(사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질문 없는 사고는 없다. 사고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을 하든지 아니면, 남의 질문을 받든 지, 어떤 형태이든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고력은 늘 질문에 노출된 상태에서의 부단한 사고의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산물인 것이다. 우리나라 공교육의 맹점은 질문이 없는 암기 위주의 수업이다 보니 사고력 훈련이 불가능하고 문제 해결 능력이 길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고의 유형에는 비판적 사고, 논리적 사고, 창의적 사고, 분석적 사고 등이 있다. 바로 이 사고가 ‘철학하다’의 네 번째 단계이다.  

    

이러한 사고의 결과로 어떤 앎이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러한 결과물을 이론(Theoria)이라 한다. ‘철학하다’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 그 사람의 철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사로서의 ‘철학’은 이러한 동사로서의 ‘철학하다’에 의해서 얻어지는 결과물인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철학은 삶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활용되거나 이용되어야 한다. 철학은 실천(Praxis)에 의해서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삶의 지혜가 된다. 이 실천의 단계가 ‘철학하다’의 마지막 과정이다. 실천을 통해서 내 삶을 변화시키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한다. 즉 내적으로 성숙해지고 성장하고, 외적으로는 변화된 삶을 살게 된다. 이렇게 실천의 단계까지 아우르는 것이 ‘철학하다’이다. 이 ‘철학하다’가 삶 속에 뿌리내리면, ‘철학하는 삶’이 된다. 2천5백 년 전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무지의 자각을 일깨워주기 위해 대중을 찾아다니며 그들과 소통했던 앎과 함이 일치한 삶이 바로 ‘철학하는 삶’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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