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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캘리그래피 석산 Jul 09. 2021

제28화 樂하산, 好산행

초입에 높게 뻗은 큰 나무숲이 있는 등산로들이 있다. 등산객들은 울창함에 탄성을 지르며, 정상을 향해 올라간다. 오르다 어느 순간 크게 자란 나무들은 보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산 전체를 지배할 것 같았던 아름드리나무들이 산 위로 번식해 가는 데는 실패한다. 최정상에는 곧게 자란 큰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잦은 풍파에 휘어졌거나 작은 나무들 밖에 없다. 세찬 바람과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바람의 반대방향으로 자신을 구부리거나 최대한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가장 높은 곳에서 최악의 조건에서 생존 지혜를 깨우친 겸허한 나무들만이 자라고 있다. 그들은 힘자랑하는 큰 나무들을 발꿈치 저 아래에 두고 지긋이 굽어보고 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초년기에 삶을 좌우할 것 같았던 거창한 지표들이 중년을 넘기고 나면 그저 부질없어 보인다. 노년에 접어들 즈음이면 거창하고 잘난 사람보다는 “변함없는 사람, 편안한 사람”이 더욱 높아 보이고 소중해진다.   

  

우리는 삶 자체가 모두 오르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다. 성적도, 지위도, 재산도 늘 오르고 많아져야 한다. 게임하듯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전쟁하듯 정상에만 오르려고 한다. 그러나, 오르는 것보다는 오른 이후가 더 중요하다. 산 정상에서의 식사는 늘 즐겁다. 네 것, 내 것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내려갈 때 짐이 되니 아낌없이 나누고 모두 소비한다.  

   

아무리 산행을 좋아해도 정상에 머무르는 시간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한다. 또, 영원히 정상에 머물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나눌 수 있을 때 나누고 감쌀 수 있을 때 감싸 안아야 한다.   

  

인생의 묘미는 오히려 내려가는 데 있다. 혼자서 헐떡이며 내려가는 무료함이 아니라, 담소를 나누며 주위의 꽃과 나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계곡에 발을 담그고 휴식을 취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잘남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유람하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산을 오를 때의 피로를 내려갈 때 잘 풀어야 좋은 산행이 된다. 정상 정복은 산행의 끝이 아니라, 산행을 즐겁게 마무리하는 또 다른 시작이다. 은퇴는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내려가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설렘이 되어야 한다. 즐거운 하산이 삶을 빛나고 아름답게 하기 때문이다.      

헬기를 이용해 신금산(앞에 보이는 산) 등산로 조성에 필요한 부자재를 싣고 있다.

난생처음 다도해해상 국립공원 내 신금산(해발 230m로 전남 진도군 조도면에 위치한 돈대산(敦臺山, 330.8m)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등산로 조성에 필요한 부자재(헬기 이동)에 따른 일일 막노동 체험을 하게 되었다. 안 해 본 막일이다 보니 처음에는 힘이 들었지만 1시간이 지난 후부터는 할 만했다. 신금산의 높이가 200여 미터가 넘다 보니 모든 부자재는 헬기를 통해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산 정상에서부터 순차적으로 공사에 필요한 원목을 비롯한 부자재를 한 곳으로 통합해 등산로 공사하는 사람들의 유기적인 일 처리에 필요한 사전 포석인 셈이다.

     

8kg이 넘는 나무는 꼿꼿했다. 글씨를 새기면 좋을 것은 생각이 들었다. 쓰임이 다한 나무들이 한쪽에 폐기용으로 나뉘어 있었다. 현장 소장에게 나무 한 두 개를 일 끝나고 가지고 갈 수 있냐고 물었다. 흔쾌히 가져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나무 하나 무게가 8kg이다보니 혼자 들어도 꽤 무거웠다.

다도해해상 국립공원 일터에서 가지고 온 폐목으로 작품화했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었다. 온종일 장맛비가 쏟아졌다. 마당 어귀에 세워 둔 나무는 비에 젖는다. 이틀 후 물 먹은 나무에 글씨 혼(魂)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같은 폐목일지라도 국립공원 일터에서 가져온 폐목은 바닷가에서 수거해 온 폐목보다는 사뭇 달랐다. 어쩌면 짠내 나는 바닷물을 먹지 않았다는 것이 다른 점이고 풍파를 이겨내는 강도 또한 바닷가에서 가져온 폐목보다는 조금 덜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그렇게 등산객들의 편안한 길잡이를 했던 등산로 폐목은 지금 내 옆에서 또 다른 목적으로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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