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뱀의 영혼이 깃들어 파워업!

생태유학 23. 밤 산책에서 생긴 일

by 선정수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곰배령 설피마을로 생태유학을 하러 온 딸아이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연이 풍부하고요. 부수적으로는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되고, 항상 함께 놀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아이들이 다니는 기린초등학교 진동분교장은 엄연히 정규 학교입니다. 선생님들도 의욕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시기 때문에 도시학교와 다르지 않게 숙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딸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숙제라고 하네요. (아마 두 번째로 싫은 건 집에 들어와서 바로 씻는 것일 거예요.)


생활적인 측면에선 거의 갈등을 빚지 않는 부녀이지만, 숙제해라, 씻어라 하는 잔소리 하기는 정말 힘든 일입니다. 저는 잔소리를 듣는 것도 정말 싫지만, 해보니까 잔소리하는 걸 듣는 것보다 더 싫어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죠. 가급적 스스로 알아서 혼자서 일상을 소화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을 정하고는 있지만 잔소리를 안 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생태유학 어린이들은 정말 여러 기관의 많은 관심을 받으며 훌륭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주중에는 학교에서 진행하는 방과 후 교실과 인제로컬투어사업단이 제공하는 화상영어, 연극놀이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요. 주말에는 인제 RCE에서 진행하는 야생동물생태학교 프로그램(월 1회) 참여하죠. 산골에서 뭐 하고 지내냐며 매우 무료한 생활을 연상하실 분들이 계시겠지만, 생태유학 아이들은 굉장히 알찬 하루를 보내고 있답니다.


그날도 딸아이는 오후 7시 무렵 원어민 선생님과 화상영어 수업을 20분 진행했습니다. 기분 좋게 쏼라쏼라 한 다음에 산책을 나가자고 하더라고요. 미적미적하다 보니 깜깜해졌죠. 곰배령 설피마을은 보안등 몇 개만 빼고는 거의 빛이 없습니다. 그래서 밤 산책을 나갈 때는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나갑니다. 그래야 잘 보이기도 하지만 야간에 마을을 달리는 자동차가 우리를 먼저 보고 속도를 늦출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기도 합니다. 안전은 가장 중요하니까요.


헤드랜턴을 쓰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요즘 부쩍 겁이 많아진 딸아이는 깜깜하고 춥고 바람 부는 날씨에 위축된 것 같습니다. 얼마 안 가서 무서우니까 들어가자고 합니다. 가까운 다리까지만 다녀오자고 하고는 발을 옮기는데 딸아이가 무언가를 발견했습니다. 작은 뱀이었습니다. 꼼짝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죽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차에 밟혔네요. 사고를 당한 지는 조금 오래된 것 같습니다. 일단 현장 사진을 확보하고요. 그냥 돌아갈 수는 없으니 사체를 흙으로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주변에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뱀 사체를 바닥에서 뗍니다. 거의 납작해진 상태였습니다. 살살 도로에서 떼어내 차도 옆 계곡 쪽으로 보내줍니다. 나중은 곤충과 미생물의 몫입니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겠죠. 뱀을 돌려보내주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뱀은 무슨 종류였을까요? 대한민국 최고 야생동물 전문가 한상훈 박사님께 사진과 함께 문의했습니다. 2~3년 된 누룩뱀 어린 개체로 추정된다고 하십니다. 한 박사님은 "상태가 좋으면 냉동보관이라도 해 주면 안 될까요?"라고 요청하십니다. 아마 나중 연구에 쓰실 생각이신가 봅니다. 아뿔싸 이미 뱀은 흙으로 돌아갔는데... 딸아이와 함께 다시 밖으로 나가서 뱀 사체를 찾습니다. 도로에 뱀이 붙어있던 흔적을 먼저 찾은 뒤에 뱀 사체를 돌려보낸 방향을 집중적으로 수색합니다. 20~30분 정도 찾아봤지만 결국 실패! 깜깜한 밤에 무언가를 찾는 건 굉장히 어렵습니다. 군대 시절 잃어버린 탄피를 찾던 생각이 납니다. 날 밝으면 다시 찾기로 하고 철수합니다.


이제 딸아이는 숙제를 해야 할 시간입니다. 진을 빼고 돌아온 상태라 숙제하기 싫다고 징징댈 게 뻔했지만, 그래도 할 것은 해야죠. 그런데 웬일인지 군말 없이 척척 숙제를 잘하는 겁니다. 수학 문제집 풀기였는데 10분 만에 다 하고 무려 백점을 맞았습니다. 딸아이는 "뱀의 영혼이 깃든 것 같아~"라고 말합니다. 지난번에 길 옆에 방치됐던 노루 털가죽을 묻어줬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터라 약간 이해가 갑니다. 뭔가 굉장히 큰 일을 해낸 상태라 엔도르핀이 뿜뿜하고 학습능력이 급상승하는 상태인가 봅니다. '뱀의 영혼'과 '노루의 영혼'이 깃드는 상태요. 다만 유효기간은 그렇게 길지는 않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뱀 사체 추가 수색을 나갔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또 비슷한 일을 겪으면 사체를 수거해 냉동보관할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겠습니다. 가드레일에 몸을 걸치고 길 바깥 계곡을 살피고 있는데 자동차 몇 대와 사람 몇 명이 지나갔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요. 옆집 쌍둥이네 할머님이 아침 산책을 하고 오시는데 시커먼 남자가 가드레일에 걸려있어 매우 놀랐다고 하시네요. 아마도 '사건의 냄새'를 순간적으로 상상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하고요~

KakaoTalk_20240512_092441224.jpg
KakaoTalk_20240512_092441224_02.jpg
로드킬 누룩뱀 어린개체. 아이 손바닥보다 조금 컸습니다. 자연으로 돌려보내 줬습니다.
KakaoTalk_20240512_092441224_03.jpg
KakaoTalk_20240512_092441224_04.jpg
새벽에 추가수색을 하고 돌아오늘 길에 마을 길냥이를 만났습니다. 복슬복슬한 흰제비나방 애벌레도 만났고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개구리를 구했더니 박쥐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