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유학32. 9세 어린이와 곰배령 등산하기
"아빠, 뒤에 뭐가 있어~", "뭐가? 엇 이게 뭐야."
수상한 물체는 빠른 속도로 꿈틀거리며 등산로를 빠져나갔다. 짙은 회색, 약간 꾸덕한 슬라임 같은 느낌, 또는 물풍선 같은 느낌인데, 크기는 큰 소시지 또는 막대기 달린 핫도그만 한 크기다. 땅에 납작 붙어서 씰룩씰룩 움직이더니 낙엽 밑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바로...
여기까지만 보고도 정체를 짐작하실 수 있는 분은 고수입니다. 그건 바로 '두더지'였습니다. 얼굴을 보고 싶어서 낙엽을 손으로 파헤쳤더니 꿈틀거리면서 멀리 도망쳤습니다. 어찌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산을 오르는 길에 다람쥐도 보고 이 날은 야생동물 관찰운이 좋습니다. 산행 도중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서 조금 춥고 불편하기는 했지만 정말 즐거운 날이었습니다.
곰배령 아십니까? 설악산국립공원 끝자락 점봉산과 붙어있습니다. 행정구역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와 귀둔리에 걸쳐있습니다. 생태유학 어린이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곰배령 설피마을이니까 마을 뒷산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설악산의 형제인만큼 높이는 1000미터를 훌쩍 넘습니다. 1164미터라네요. 설피마을이 해발 670미터 정도니까 수직으로 500미터를 더 올라갑니다.
경진이와 함께한 곰배령 산행길. 곰배령은 국유림이자 산림청이 정한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입산이 엄격하게 통제됩니다. 겨울부터 봄까지는 산불예방기간으로 입산이 전면 통제되고, 그 이외 기간도 인터넷 예약 등으로 사전 예약을 해야만 입산이 가능합니다. 인터넷 예약 450명, 진동 2리 지역주민과 맺은 협약으로 인해 펜션, 민박에 위탁한 입장쿼터가 그 정도 있고, 지역주민들은 사전 입산신청을 하면 연간 30회 정도 입산이 허용된다고 합니다. 경진이네는 엄연히 지역주민이므로 지역주민 쿼터를 이용했습니다.
곰배령 산행길은 곰배령 주자창부터 시작됩니다. 주자창 끄트머리에 산림생태관리센터가 있고요. 여기에서 예약 여부를 확인합니다. 확인이 되면 빨간색 플라스틱으로 된 입산허가증을 줍니다. 성인과 동반한 어린이는 따로 예약이 필요 없습니다. (성인 1인당 아동 최대 5명) 경진이는 특별대우를 받는 셈이죠. 센터분들이 경진이를 보더니 "너 정말 저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어?"라고 묻습니다. 친근감의 표현이죠. 그러나 경진이는 살짝 무시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고 하네요.
센터에서 곰배령 정상부까지는 5.1km 1시간 50분 코스입니다. 올랐던 길 다시 내려와도 되지만 하산 전용코스가 따로 있는데 5.4km 2시간 코스입니다. 전체적인 난도는 높지 않아서 어르신들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초4 만 9세 꼬맹이에겐 조금 힘이 들었나 봅니다. 과천 관악산 연주대 코스를 오르는 느낌으로 시작했는데, 그것보다는 조금 더 힘들었는 모양입니다. 중간쯤에는 배가 아프다고 하고 어지럽다고 하고 얼마나 더 가야 되냐고 계속 묻더라고요.
그랬더니 한 고비를 지나자 정상에 대한 의욕을 드러냈습니다. 산행길에 만난 어른들이 "아유 꼬맹이가 씩씩하게 잘도 오르네" 이런 격려를 많이 해주셔서 더 힘이 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르는 도중에 비가 쏟아졌는데요. 우산을 받쳐 들고 산을 오르는 분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정말 비 맞는 걸 싫어하나 봐요. 우리는 꿋꿋이 비를 맞으며 정상까지 나아갔죠. 비도 오고 날이 궂어서 오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덕분에 정상석에 인증샷 찍는 대기줄이 매우 짧았습니다. 간단히 인증샷을 남긴 뒤에 식사장소로 옮겨서 준비해 간 빵을 나눠먹었습니다.
하산 전용코스로 내려올까 싶어 5분 정도 걸었는데, 다리가 뻐근했던 꼬맹이는 왔던 길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나 봐요.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데 다람쥐가 등산로로 달려들었습니다. 곰배령은 정말 원시림인가 봐요. 두더지, 다람쥐에 멧돼지 흔적도 발견하고, 딱정벌레들도 많이 만났던 산행길이었습니다.
경진이는 내려오는 내내 "아까 그 입구에서 못 올라간다고 했던 아저씨한테 정상까지 다녀왔다고 이야기해 줘야 되는데... 퇴근했을까?" 하며 걱정하더라고요. 뭔가 분함이 풀리지 않았나 봐요. 다 내려와서는 몸이 다 젖은 관계로 일단 집에 와서 씻고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곰배령 입구로 향합니다. 경진이가 진동분교 친구인 '다윤이네'가 하는 식당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네요. 이름은 비코(VIKO)이고요. 곰배령 주차장에 바로 붙어있어요. 산채비빔밥과 황태해장국 감자전을 시켜서 맛나게 먹었죠. 일전에 버섯전골도 먹어본 적이 있는데 모두 맛있습니다. 다윤이와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산행은 마침표를 찍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