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유학 48. 산골에서 만난 아름다움의 극치
라디오 방송 원고를 쓰느라 바쁜 목요일이었습니다. 전날부터 아침까지 원고 주제를 찾고 자료를 모으고 개요를 짰죠. 방송작가님이 OK를 내주셔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기로 했죠. 목적지는 진동호. 양양양수발전소 상부댐이라고도 부르는 곳입니다. 동네 뒷산 꼭대기에 거대한 호수가 있는 셈이죠. 이 댐 둘레로 수몰되지 않은 산 꼭대기들이 이어져 있습니다. 댐 운영사인 한국수력원자력은 동네 주민을 위해 이 둘레길을 개방했습니다. 덕분에 마을 주민들이 산책을 하고, 곰배령 등산이 통제되는 날에 등산객들이 찾기도 하죠.
앞선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저와 딸아이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어요. 바로 '관찰카메라로 야생동물 발견하기'인데요. 이 상부댐 둘레길은 인적이 드문 곳이고 깊은 산속으로 백두대간과 이어져있기 때문에 야생동물도 많습니다. 곳곳에서 멧돼지가 파헤친 흔적과 삵의 배설물을 발견할 수 있고요. 온갖 새들이 날아와 노래를 부르는 곳이기도 합니다. 상부댐에도 야생동물 관찰 카메라를 설치했죠. 우리는 이곳에서 고라니 1마리를 목격했습니다.
고라니 말고도 삵이나 멧돼지, 산양 등 다른 동물도 확인하고 싶어서 상부댐 둘레길 주변에 자리를 옮겨가면서 카메라를 걸고 있습니다. 왔다 갔다 산책도 되고 운동 삼아서 다니기에 참 좋습니다. 요즘 이곳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 2리 곰배령 설피마을은 겨울이 찾아와서 아침저녁으로는 굉장히 춥습니다. 집게벌레가 열심히 건물 안으로 기어들더니 요즘엔 노린재가 극성이네요. 다 살자고 하는 일인 걸 어쩌겠습니까. 페트병을 이용해 가둬놨다가 바깥에 놔주면 낙엽 밑이라든지 겨울을 날 곳을 찾아가겠지요. 어제와 그저께는 얼음이 얼고 서리가 하얗게 마을을 덮었습니다.
상부댐에 도착한 건 점심을 먹고 오후 2시쯤 됐을 때인데요. 둘레길 초입에서 삵의 배설물을 발견합니다. 다음번엔 꼭 삵을 찍고 말겠다는 결심이 서네요. 좀 더 깊이 들어가는데 낮 2시가 됐는데도 그늘진 곳엔 서리가 녹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게 신기합니다. 그러다가 길 옆으로 눈을 돌리는데 흰 물체가 눈길을 끕니다. 처음엔 누가 비닐봉지를 버린 줄 알았는데요. 좀 이상해서 자세히 관찰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비닐봉지가 아니라 얼음이라는 걸 깨닫게 됐죠. 혹시나 싶어서 손으로 잡아봤는데요. 살살 녹는 것이 정말 얼음입니다.
세상에나 만화에서나 나오는 줄로만 알았던 서리꽃이 눈앞에 펼쳐지다니요.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Frozen)에 나왔던 장면 기억나시나요. 안나가 엘사를 찾아 눈 산으로 들어가다가 올라프를 만나는 장면이요. 거기서 얼음꽃이 만발한 장면이 펼쳐지죠. 얼음꽃은 혹한의 날씨 속에 나뭇가지에 쌓였던 눈이 태양광을 받아 녹으면서 얼어붙어 이뤄지는 것이죠. 그런데 이 서리꽃은 약간 생성원리가 다르다고 합니다.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면 식물(주로 긴 풀)이 얼어붙으면서 식물 속 수분이 얼어붙으면서 팽창합니다. 그럼 식물 조직에 길고 얇은 균열이 생기게 되고요. 이 갈라진 틈으로 물이 스며 나오면서 얼어붙습니다. 그 위로 또다시 물이 스며 나오면서 얼어붙기를 반복하게 되죠. 이런 과정을 통해 얇은 얼음이 마치 데니시 패스츄리 같은 모양으로 커지게 되는 것이죠.
이 서리꽃을 '빙화'로 번역하기도 하는 모양인데요. 하이원리조트에서 이 현상을 관찰해 보도자료를 낸 적이 있나 봅니다. 많은 언론이 이 서리꽃에 대해 "매우 희귀한 자연현상으로 예부터 빙화를 만나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얘기도 전해진다."라고 전합니다.
여러분도 사진으로나마 귀한 서리꽃 많이 보시고, 행운도 가져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직접 봤으니까 좀 더 많은 행운을 가져갈게요.
혹시나 해서 아침에 집 앞 수풀을 좀 찾아봤는데요. 역시나 있더군요. 집 앞에서 이런 귀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는 진동 2리 설피마을, 진동분교 역시 짱짱입니다.
겨울왕국 초입에 서리가 내려서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했습니다. 딸내미는 눈이 오라고 주문을 외우고, 눈이 쌓이는 꿈을 꾸고 있는데요. 눈 대신 서리라도 좀 감상하시라고 멋진 사진 올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