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선약수 Jun 01. 2020

엄마는 성장 중~  

쫌 안 쿨(cool)하면 어떻노!

휴직하고 베트남에서 전업주부로 살게 된 나는,
그동안 제대로 못 한 ‘엄마 역할’을 정말 잘하고 싶었다.


내가 엄마로서 머릿속에 그렸던 베트남에서의 일상은 다음과 같았다.

 

'아침에 아이 등교 준비를 도와주고, 학교 잘 다녀오라고 손 흔들어준다. 아이가 하교할 시간에 맞춰 맛있는 간식을 만들어 놓고, 귀가하는 아이를 웃으며 맞이한다. 공부하느라 고생했다며 힘껏 안아 토닥여줘야지. 아이는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재잘대고, 나는 맞장구를 치며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한다. 아이가 숙제를 끝내면 함께 운동하고 책도 읽고, TV도 보면서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낸다.'  

(워킹맘으로 살았던 21년 동안 누려보지 못한 일상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베트남에서의 현실은...?


지원한 국제학교에 다 떨어지고, 아이를 보낼 학교가 없었다. 첫 스텝부터  꼬여버린 셈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하노이에 있는 국제학교에 지원하는 한국 학생 수가 크게 늘면서 초등 고학년부터는 영어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입학이 어려워진 형편. 그러니 국제학교에 입학하려면 영어 실력을 몇 단계 향상 시켜야 했다. 하노이 한국학교를 보내고 싶어도 이미 3월 새 학기가 시작 된 터라 입학이 안 되었다. (전, 편입 시기가 일 년에 4번으로 정해져 있다)   

   

지원했다 떨어진 국제학교에 메일로 의뢰한 결과, 4~5개월 뒤 입학 재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영어가 단시간에 될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6학년이 되도록 숙제 외에는 책상에 앉아 공부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무엇보다 세 번의 탈락으로 아이의 자존감에 깊은 상처가 생긴 게 더 큰 문제였다.     

아이는 컴퓨터 그림판에 베트남 국기를 그리고 실험에 떨어진 좌절감을 표현했다.


그때 큰딸이 나와 둘째 사이에서 해결사 역할을 해주었다. 둘째는 엄마만큼이나 언니를 좋아하고 따른다. 아니 지금은 엄마보다 언니 말을 더 잘 듣는 편이다. 7살 터울로, 둘째가 어린이집 다닐 때부터 일하는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했으니, 둘째가 믿고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큰딸의 초등학교 입학을 며칠 앞두고 유산 징후가 있어 병원에 입원하고, 결국 조산해서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큰딸은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둘째를 낳은 엄마라면 누구나 첫째 아이에게 미안함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부모의 사랑을 뺏긴 첫째는 동생이 귀여우면서도 시기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큰딸은 질투하거나 섭섭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을 이해하기엔 어린 나이였지만, 제 눈에도 아주 아프고 약해 보였던지 동생의 고집과 투정을 받아주고 보살펴 주는 언니였다.


그런 언니와 한국, 베트남으로 생이별을 했으니, 둘째는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언니를 찾아 화상 통화를 했다. 언니는 시험 탈락으로 상처받은 동생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고,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속마음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결국 자매는 국제학교에 재도전하기로, 그래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보겠다는 뜻을 밝혔다. (둘째도 일종의 ‘오기’가 발동한 듯했다)     



그때부터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는, 둘째의 재택교육(homeschooling)이 시작되었다.


내가 가르친다고 아이와 며칠 실랑이를 벌였다.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고 접근하면 나도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명색이 2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친 교사인데...’  

이전에 쓴 글에서 공자님이 다시 살아오신다 해도 제 자식은 못가르칠 거라고 했지만, 내겐 그 어려운 것을 해낸 두 친구가 있었다. 난들 못할까.


고교 시절 단짝이었던 친구는 결혼해서 공부하러 뉴질랜드로 갔는데, 거기서 아이를 네 명이나 낳고 큰아이가 대학에 갈 때까지 네 아이 모두 홈스쿨링 하며 키웠다.       

또,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약사로 일하는 오랜 친구는 두 아이를 학원 한 번 안 보내고, 방과 후에 과외 교사를 자처하더니 큰아이를 서울대에 보냈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 엄마가 가르쳐서 서울대까지’라고 책을 써도 잘 팔릴 듯하다. (하지만 나는 이 친구에게 '애들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낫다'며 부단히도 말렸었다)  


어쨌든 제 자식을 직접 가르친 두 친구를 경이롭게 여기며, 나는 얼마 못 가서 '엄마표 수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 256’ 우리 집은 '사교육 걱정 가득한 집'이 되어버렸다.

‘불필요한 사교육은 지양’해야 하지만, 불가피한 상황에서 한시적으로 사교육의 도움을 받아보자고 생각했다. ‘공교육을 받기 위한 사교육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교육에 한발을 들여놓으니 늪처럼 점점 더 빠져들게 되더라는...

그 세계에 들어가긴 쉬워도,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는 어렵더라는....     



둘째 아이는 집에서 몰아치기 영어 과외를 받으며 공부한 지 5개월 만에 재시험을 본 두 학교 중, 한 학교에서 드디어 입학 허가를 받았다. 물론 여전히 영어 실력이 부족하지만, 5개월 동안 향상된 정도를 볼 때 앞으로 기회를 줄 만하다고 판단했단다. 대신 앞으로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둘째가 집에서 공부한 지 3개월이 지날 즈음, 마침 하노이 한국학교 편입 및 전학 공고가 떠서 거기 편입해 잠시 다녔다. (만약 국제학교 재시험에 떨어졌었다면 계속 다녔겠지만, 합격하여 국제학교로 전학할 때까지 한 달 보름 정도 다녔다.) 
혹시 베트남으로의 이주를 생각하는 가족이 있으면 반드시 미리 학교 체크를 권해드린다. 요즘은 하노이 한국학교도 초, 중, 고 모두 포화 상태라 입학이 매우 어렵고, 전, 편입 공고 인원이 적거나 없어서 한국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까지 있기 때문이다      


국제학교에 등교한 첫날은 울면서 집에 돌아왔던 아이가 며칠 지나자 표정이 밝아지고, 한 달쯤 지났을 때는 다닐 만하다고 얘기했다. 소극적인 아이라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하는 편인데, 국제학교에 한국 학생들이 적다 보니 어차피 말 통하는 그들끼리 어울리게 되고, 친구가 생기면서 학교에도 차츰 적응해갔다.     

그렇게 입학한 국제학교를 현재 만 4년째 다니고 있다.


그럼 아이가 원하던 국제학교를 입학하고 난 뒤에는 사교육이 필요 없었을까?


물론 아니다. 입학할 때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겠다고 학교에 약속한 바가 있으니 입학의 기쁨도 잠시, 우리는 또 쫓기는 입장이 되었다.

‘인생은 산 넘어 산’임을 알면서 매번 잊어버리고 속고 또 속는다.     

  

내 아이를 국제학교에 보내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스트레스 덜 받고 자유롭게 공부하며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큰아이를 키울 때와 마음가짐이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아이가 행복하게 성장하기를 바랐을 뿐인데 아이와 나는 왜 그렇게 힘들었던 걸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국제학교가  모두 ‘서머힐(1921년 영국의 교육자 A.S 니일이 설립한 자유롭고 행복한 학교를 지향하는 자율학교)’과 같을 거라 지나친 환상을 가졌던 것일까.

(국제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하노이에서 국제학교에 다니는 한국 학생 중 다수가 한국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많은 사교육을 받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학교 선택의 문제도, 사교육을 하고 말고의 문제도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너무 경직된 사고의 틀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스스로 견디기 힘들어한 것이다. 나는 멋진 엄마여야 했고, 아이는 자유롭고 행복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을 내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종의 ‘강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이에게 모범을 보여야지, 못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아이들 문제에서 감정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엄마라고 착각했다.    

 

둘째 아이는 오히려 과보호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약한 아이라고, 아이에게 밀려오는 세상사 모든 파도를 엄마가 나서서 막고 해결해줄 수도 없는데... 

어쩜 아이가 힘들어 할까 봐 부딪혀 보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피해가려 했었는 지도 모르겠다.

중간에 는 아이에게 힘들면 안 해도 된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오히려 아이가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다. 나름 노력해도 학교 성적이 좋지는 않지만, 느려도 천천히 공부하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다. 무엇보다 지금 학교생활에 만족하니 다행으로 여긴다.


그동안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 256호 집’은 잠시 그 문패를 내렸다.

꽤나 이성적이고 교양있는 엄마인줄 알았던 나는, 나의 ‘민낯, 밑바닥 모습 을 확인하는 아픈 경험을 했다.  

    


이번 글은 쓰는 데 꽤 오래 걸렸다. 쓰다가 멈추기를 반복하고, 마지막엔 또 끝맺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미적대고 있는데 한국에서 큰딸이 카톡을 보내왔다.

며칠 전 브런치에 쓴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 256호의 붕괴 조짐> 글을 이제 읽고 보낸 톡이었다. 나 스스로 멋진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고 고백한 내용이 딸 마음에 걸렸던지...

‘좀 안쿨하면 어떠노’ 

라고 말했다.     

큰딸과 나눈 카톡 대화

딸은 소위 ‘쿨(cool)한 엄마’가 되지 못한 나를 오히려 위로하고 있었다. 최고라는 '엄지 척' 이모티콘까지 곁들여서.


어느새 내 딸이 엄마를 위로해줄 만큼 자랐네!!

딸의 한마디에 마음이 뭉클했다.      

‘그래, 엄마라고 항상 잘 할 수 있나?

엄마도 실수하고 못난 모습 보일 때가 있는 거지.'  

"엄마도 계속 성장 중이거든~"


"딸~ 고맙고, 사랑해!"란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 256호의 붕괴 조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