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묵은지 고등어조림'과 '고갈비(고등어 양념구이)'
베트남에서 보내는 시간도 이제 보름 남짓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매일 보던 풍경도 달리 보인다. 이렇게 고층에서 내려다보는 탁 트인 뷰를 배경으로 책 읽고 차 마시던 여유로운 일상과도 이제 곧 작별해야 한다.
작별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무엇보다 낯선 타국에서 서로 의지하며 정들었던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느라 바쁜 요즘이다.
어제는 친하게 지내는 엄마들 모임에 한 사람이 새집으로 이사를 하여 우리를 초대했다. 새집 구경을 하며 인테리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아줌마들의 수다는 여느 때처럼 '기승전 자식 이야기'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남자들이 모여 '군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것처럼, 엄마들의 임신과 출산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대화의 주제가 '집 구조와 가구 취향'에서 어쩌다 '입덧'으로 옮겨가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 롯***의 특정 햄버거에 꽂혀 매일 2개씩 먹다 보니 체중이 25kg이나 늘었다는 한 엄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평소에는 쳐다도 보지 않았는데 임신하고 입덧하면서 신기하게 먹고 싶어 졌던 '음식 이야기'가 줄줄이 사탕 엮듯이 이어졌다.
임신으로 입맛이 달라지는 경험을 한 엄마들이 많은 반면, 나는 딸 둘을 임신했을 때 임신기간 동안 줄곧 입맛이 없는 편이었다. 특별하게 먹고 싶은 음식이나 과일도 없었는데 그래도 유일하게 먹고 싶고,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은 엄마의 '묵은지 고등어조림'과 '고등어 양념 구이'였다. 그건 특별한 음식이 아니고, 내가 어릴 때부터 가장 즐겨 먹던 친숙한 음식이었던 것이다.
'엄마의 손맛'하면 떠오르는 울 엄마의 대표 음식!
언젠가 오빠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엄마가 가르쳐 주시는 그대로 음식을 해봐도 왜 엄마가 직접 만들어주시는 그런 맛이 안 나는지 모르겠어'라고.
그때 큰오빠는 그 이유가 '정성의 차이'라고 단호하게 말했었다. 엄마는 사랑하는 자식을 먹일 생각에 그야말로 정성을 가득 담아 음식을 만드는데, 나는 그냥 한 끼 먹기 위해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 그 자리에서는 동의하지 않았는데 뒤에 혼자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빠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손맛'이라고 내세울 게 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결혼해서부터 직장 생활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김치나 밑반찬은 시어머니, 친정어머니로부터 받아 해결할 때가 많았다. 내가 직접 국이나 찌게 등 반찬을 하더라도 '정성을 다해 맛있게 만들어야지'하는 마음보다 그저 '한 끼를 때운다'는 마음이 더 컸던 게 사실이다. 그러니 그 자리에 '엄마의 손맛'이 생겨날 리 만무하다.
둘째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
"우리 엄마는 계란 프라이를 잘하십니다"
라고 나를 다른 엄마들에게 소개하는 바람에 내 얼굴이 홍당무처럼 되었던 적이 있었다.(계란 프라이를 자주 해주지 않았는데 당시 정말 부끄럽고 억울했다)
큰딸이 학생기자로 활동할 때 쓴 어떤 글에서는 '친할머니의 김치찌개, 외할머니의 고등어조림을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라고 자신을 설명하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 글을 읽으면 부모 없이 할머니들 손에서 자란 아이로 알겠다는 생각에 엄마인 난 기분이 무척 상했었다.
또한 큰딸은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카레가 싫다는 뒤늦은 고백을 했다. 그 이유인즉, 방학 때도 보충 수업을 위해 출근하던 엄마가 자주 카레를 만들어놓고, 며칠 연속으로 먹어야 했던 통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직장 생활할 때는 끼니 해결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만을 음식 만들기에 사용하였다. 그러니 '엄마의 손맛'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휴직하고 베트남에 와서 전업주부로 살다 보니 '시간에 쫓기지 않고'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비로소 지나간 시간 동안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었는지 되돌아볼 수 있었다.
특히 베트남에 온 뒤로는 친정엄마가 해주셨던 음식을 먹을 수 없어 '엄마표 음식'이 더욱 그리울 때가 있는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훗날 내 딸들은 지치고 힘들 때 그리워할 '엄마의 손맛', '엄마표 음식'이 있을까?'
돌아올 대답을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큰딸에게 한 번 물어보았다.
역시나 큰딸은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고, 눈을 여러 번 깜박이며 머뭇머뭇하더니 내가 실망하는 내색을 하자,
"엄마 월남쌈 잘하잖아~"
위로해주듯 한 마디 내뱉었다.
'Oh, my God!'
각종 야채를 채 썰고 고기와 함께 라이스페이퍼에 싸서 소스에 찍어 먹으면 되는 월남쌈이라니!! 딸이 고육지책으로 겨우 생각해낸, 엄마의 대표 음식으로 꼽은 월남쌈에 나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어디에 '엄마의 손맛'이 깃들여 있단 말인가...!!
임신 초기 입덧하느라 입맛이 없어 힘들었을 때도, 입덧이 끝나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도, 임신 기간 내내 일관성 있게 먹고 싶었던 엄마의 '묵은지 고등어조림'과 '고등어 양념 구이'.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고등어가 주재료라는 점에서 두 음식에 대한 취향이 겹치는 듯 하지만, 날씨나 나의 기분, 몸 컨디션에 따라 그 끌림에는 묘한 차이가 있었다.
#1.
날씨가 흐리거나 스산하게 비가 오는 날, 또는 기분이 우울하거나 유달리 지치고 피곤하게 느껴지는 날이면 엄마에게 전화해서 엄마가 만들어주는 '묵은지 고등어조림'이 먹고 싶다고 어린애 투정 부리듯 얘기했다. 그런 날이면 칼퇴근하여 곧장 친정집으로 향하고,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풍겨오는 냄새에 무장해제 상태가 된다. 묵은지와 어우러진 고등어조림 냄새가 나를 먼저 반기며 2층으로 오르는 임산부의 무거운 발걸음조차 재촉한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면 주방이 뿌옇도록 가스레인지 위 냄비에서는 뜨거운 김이 한창이고, 냄비 뚜껑 들썩이는 소리, 보글보글 맛있게 양념 졸여지는 소리와 더욱 고소해진 냄새가 진동하며 내 몸의 모든 감각세포들을 일깨웠다.
"엄마~~~"
문을 열고 들어서며 외치는 한 마디!
그 한 마디엔 '엄마, 나 왔어요. 무지 피곤하고 배고파요. 빨리 묵은지 고등어조림 먹고 싶어요~'하는 말이 다 내포되어 있음을 엄마는 알고 계셨을 것이다.
"거의 다 됐다. 방에 가서 좀 누워 있어"
임신한 몸으로 직장 생활하는 딸이 엄마는 애처로운 것이다.
주방에서 저녁 준비로 혼자 바쁜 엄마 얼굴만 빼꼼 보고는, 쪼르르 바로 안방으로 직행이다. 이불이 깔려있는 따뜻한 아랫목에 몸을 누이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기고 어느새 잠이 들고 만다. 엄마는 주방 식탁에 저녁을 차리지 않으시고, 피곤해 잠이 든 딸을 위해 상에 음식을 차려서 안방까지 들고 오셨다.
"영아, 일어나 밥 먹자"
결혼해서 한 가정을 일구고 이제 곧 아이의 엄마가 될 사람이 자신의 엄마 앞에서는 여전히 어린애처럼 굴었다. 어린 시절, 밖에서 실컷 놀다 들어와 엄마가 저녁 차리기를 기다리다 잠이 들고, 엄마가 상을 차려와 깨우면 그제야 부스스 일어나 저녁을 먹던 철부지 어린애로 '퇴행'할 수 있었던 것은, 임신해서 나도 엄마가 되기 전 마지막으로 누려보는 하나의 '특권'처럼 느껴졌다.
밥상에는 갓 지은 잡곡밥과 '묵은지 고등어조림'이 함께 모락모락 하얀 김을 피어올리고 있었다. 뚝 떨어졌던 식욕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상추쌈'이다. '묵은지 고등어조림'과 '상추'는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최고의 궁합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등어 기름 밴 간장, 고추장 양념과 상추는 매우 잘 어울리는 맛일뿐더러, 묵은지가 들어가 약간 짠맛을 상쇄시켜주는 역할도 한다)
'묵은지 고등어조림'을 그냥 먹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앙코 없는 찐빵'을 먹는 것과 다름이 없다. 손바닥 위에 큼직한 상추를 하나 올리고 그 위에 뜨거운 밥은 조금, 고등어살 듬뿍, 푹 익어 물렁해진 묵은지나 무도 하나 얹는다. 마지막으로 자작한 조림 국물을 한 숟갈 떠 부은 뒤 쌈을 싸서 입 한가득 밀어 넣으면 행복 바이러스가 온몸으로 퍼져 나감을 느낀다. 세상에 둘도 없는 최고의 맛임을 자부한다. 상추는 몇 명이 먹어도 족할 양을 나 혼자 다 먹어 치울 정도로 맛있게 쌈 싸 먹는데, 그런 나를 보며 친정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 어른들이 임신해서 쌈 싸 먹는 거 좋아하면 애가 딸이라고 하던데..."
나는 첫째,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변함없이 '묵은지 고등어조림'으로 상추쌈 싸 먹기를 즐겼고, 아니나 다를까 엄마 말씀대로 정말 딸 둘을 낳았다.
#2.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아서 뭔가 맛있는 음식으로 내 몸에 보상을 하고픈데... 사 먹는 음식은 싫고, 엄마가 해주는 집밥이 생각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고등어 '조림'보다 '구이'가 더 구미를 당긴다. 싱싱한 고등어의 뼈를 발라내고 포를 떠서 오동통한 고등어살을 초벌로 굽고, 그 위에 간장 양념(고추장도 조금)을 바른 뒤 한 번 더 구운, 일명 '고갈비'(갈비만큼 맛있는 고등어라고 해서 고갈비)도 무척 애정 하는 음식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싱싱하고 살이 도톰한 고등어를 고르는 것이 중요하고, 짜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양념 만들기가 엄마 손맛의 핵심이다. 고등어가 익으면서 육질에서 배어 나오는 생선 기름과 간장 양념이 어우러져 지글지글, 다시 싱싱하고 오동통한 고등어살 깊숙이 양념이 배어들면서 풍기는 냄새는 가히 일품인데 '묵은지 고등어조림'과 또 다른 풍미를 자랑한다. 양념 소갈비도 감히 따라올 수 없는 매력적인 맛을 품은 냄새다. 한우 고기를 먹을 때 뭔가 몸보신하는 그런 기분이 드는 것처럼, 난 엄마가 구워주시는 이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식감의 '고갈비'를 뜯어먹으면서 한우갈비 부럽지 않은 풍족함을 느꼈다.
물론 임신했을 때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엄마가 해주시는 '묵은지 고등어조림'과 '고등어 양념구이'에 대한 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생각을 하다 보니 더욱 간절하고 그립다. 특히 베트남에서는 싱싱한 생고등어를 구할 수가 없기에 '엄마의 손맛'을 흉내조차 낼 기회가 없다. 그것은 내게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엄마가 딸을 사랑하는 마음을 듬뿍 담아 만들어주신 음식으로, 딸에게 건네는 위로였고 격려였다. 지치고 힘든 나에게 위안이 되었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었다.
베트남에서 전업주부로 살면서 평소에 해보지 않았던 종류의 음식들도 직접 만들어볼 수 있었다. 스스로 담을 것이라 생각해보지 못했던 다양한 종류의 김치는 물론, 장아찌류의 저장음식도 만들어 보았다. 그러나 '백종원 요리'를 따라 하는 식의 수준일 뿐, 여전히 '엄마 손맛'이라고 할만한 나만의 레시피가 없다.
'따라 하기'라면 그 대상은 '백종원'이 아니라 '나의 엄마'나 '시어머니'여야 한다. 내가 좋아하고, 남편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맛이며, 직접 보고 물으며 배울 수 있다. 이전까지는 엄마나 시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을 먹기만 좋아했지, 그 비법을 배워 계승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워킹맘으로 바쁜 일상을 살아야 하겠지만, 이제는 '엄마의 손맛'을 물려받기 위한 노력도 하리라. 내 딸들이 임신하고 엄마가 되었을 때 그리워할 수 있는, '엄마표 음식' 한 가지는 제대로 만들고 싶다. 그래서 나도 나의 엄마가 내게 해주셨던 것처럼, 정성 가득 담긴 '엄마표 음식'으로 내 딸들을 위로하고 사랑하리라.
엄마는 올해로 여든셋, 이미 많이 연로하시지만 다행히 건강하신 편으로 혼자 생활하고 계신다. 딸이 베트남 생활을 접고 곧 귀국한다는 소식에 얼마나 기뻐하시던지... 4년 반이란 시간이 노년의 엄마에게는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 하루하루 만날 날만 손꼽고 계실 터이다.
며칠 전 전화를 해서 엄마가 해주는 묵은지 고등어조림과 고갈비가 먹고 싶다고 했다. 맛있게 만들어 사진이라도 보내달라고 했더니 요즘 시장에 고등어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다. 내가 아쉬운 대로 냉동고등어도 좋다고 했더니 어제 김치 넣고 고등어조림을 하셨단다. 뜬금없이 음식 사진을 보내달라는 내 부탁을 기억하고 폰으로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전송하려고 하니, 오래전 손녀에게 배웠던 터라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헤매다 결국 포기하셨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또 눈물이 핑 돌고,
"이제 곧 갈 거니까 그때 많이 먹으면 되죠"하며 혼자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이 말은 차마 쑥스러워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바보처럼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엄마, 고마워요. 그리고 많이 사랑해요..."
****엄마가 직접 만드신 '묵은지 고등어조림'과 '고갈비(고등어 양념구이)' 사진을 첨부하지 못해 무척 아쉽다. 대신 김창완 씨가 부른 '어머니와 고등어' 노래를 링크한다. 마음을 파고드는 김창완 씨의 음색과 따뜻한 가사가 잘 조화되어 언제 들어도 좋은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