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와 친하지 않은 인생

모든 것은 순리대로

by 섬세영


나는 어렸을때 과학자를 꿈꾸었다. 딱히 어떤 분야의 과학자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흰 가운을 입고 형형색색의 용액이 담긴 플라스크와 비커를 알코올램프로 가열하는 그런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내가 조용히 앉아 동식물을 관찰하고 여러 책을 탐독하는 모습을 본 주위 어른들이 "너는 과학자가 되면 좋게다"라며 희망 섞인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생긴 꿈이었으리라.

내가 과학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쯔음에 알게 되었다. 중학교를 다니던 시간 동안에는 느낄 수 없었던 좌절이 나를 덮쳤다. 더이상 나는 수학 시험이 끝나면 친구들이 답을 물으러 오는 학생이 아니었다. 시험지를 채점하는 소리가 혹여나 반 친구들에게 들릴까봐 조마조마하며 문제를 푸는 소심한 수포자가 된 것이다. 숫자들의 나열이 도대체 왜 이런 수식이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언어 영역과 외국어영역(내가 고등학교 재학당시의 교육과정에서는 언어영역, 수리영역, 외국어 영역, 탐구영역으로 나뉘었었다.)에서는 늘 1등급, 100점 아니면 한 문제 틀린 96점 정도를 유지했지만, 수학은 3등급 이상 받은 적이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성적이 이러했으니 수능에서 기적이 일어날리 만무했다. 언어와 외국어영역에서 총 3문제를 틀렸어도, 수리영역 4등급인 내가 갈 수 있는 대학교는 서울에 없었다. 더욱이 늘 좋지 않았던 우리 집의 경제 상황이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으 만큼 나빠졌기 때문에 재수를 할 수도 없었다. 재수를 한다고 해서 3년동안 오르지 않았던 수리영역 성적이 오르리란 보장 역시 없었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나의 미래를 더 밝혀줄 학교가 아닌 등록금을 면제해 줄 학교였다. 수리영역 4등급이었어도 장학금과 기숙사비를 면제해준다는 학교에 등록을 마음먹었다. 입학금 약 80여만원조차 부모님은 지원해주지 못했고, 십수년간 모아온 세뱃돈 적금을 털어 입학금을 마련했다.

나는 문과였다. 수학을 못하니 당연히 문과였다. 나는 언어를 잘했다. 국어도 물론이고 영어도 잘했다. 가끔 친구들이 너처럼 단어 안 외우고 단어 모르면서 외국어 영역 성적 잘나오는 애는 처음 봤다고 할 정도로 나는 타고난 언어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대학교 전공은 언어를 선택해야 겠다고 여기었다. 마침 그 즈음 읽었던 소설 속에 나왔던 홍콩에 매료된 나는 중문과를 선택했다. 중국어와 광동어는 충청도 사투리와 제주도 사투리보다도 더 큰 차이가 있음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당시엔 중국어만 배우면 홍콩에 가서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여기었다. 최선이 아닌 최후의 선택으로 오게 된 학교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멋진 교수님이 진행하던 중국어 연극에 참여하면서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욕망이 터져나왔고, 이는 곧 중문과 최초 연극과 복수전공자라는 타이틀이 되어 주었다.

쉽지는 않았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장학금을 받기 위해 좋은 성적을 받아야 했다. 등록금을 내진 않았지만 비싼 값 치루며 다니는 학교라는 생각에 시간표는 전공 수업으로 가득찼고, 밤새워 진행되는 연극 연습에도 통금 있는 기숙사 사는 복수 전공생이라는 이유로 빠지고 싶지는 않았다. 새벽 연습이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과제를 했고, 과제를 끝내면 자리에 엎드려 쪽잠을 잤다. 매일 페인트 뭍은 츄리닝에 여러 공구에 찍혀 찢어진 운동화를 신고 다녔던 터라 생긴 재미난 에피소드도 있다. 그 날도 밤샘연습이 있던 날이었고, 애매하게 진행한 휴학과 복학으로 고학번이던 내가 2학년 전공 수업에 들어가는 날이었다. 수업 시작 전 강의실에 엎드려 기절한듯 자는 나를 누군가 깨웠다. 2학년 전공수업이니 2학년이었을 그 친구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저기.. 전공이 뭐세요?"라고 물어왔다. 내 근처에 앉아 있던 나를 알던 이 질문에 배를 잡고 웃었고, 나는 머쓱하게 중문과라 답해주었다. 전혀 다른 두 분야의 접목은 또 다시 대학원 진학이라는 길을 비춰주었다. 대학 진학은 나에게 여러 의미로 나침반이 되어 준 것이다. 전화위복, 새옹지마 처럼 옛 성현들의 이야기가 하나 틀린 것 없다는 것 역시 뼈에 새기게 되었다.




중국어와 연극을 전공했고, 중국어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내 삶은 숫자보단 글자가 더 많다. 그렇지만 내 삶에서 수학, 그리고 숫자가 사라지진 않았다. 뜨개질에도 그들이 필요하다. 벽난로 앞에 앉아 도안도 없고 메모할 종이와 펜 없이, 실과 바늘만으로 스웨터를 만드는 할머니는 대단한 고수 였던 것이다. 나에게 뜨개질은 끊임없는 숫자 세기다. 뜨개의 첫 단계인 코잡기 부터 숫자가 시작된다. 근래 유행하고 있는 쁘띠 목도리 같은 경우엔 코 수가 25코 이상이 되는 경우가 많지 않고, 코바늘로 뜨는 티코스터도 처음 시작 코수가 10코 이상이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하지만 모자, 조끼, 스웨터, 담요처럼 척 보기에도 목도리보다 부피가 생기는 것들은 시작하는 코 수의 단위부터 달라진다. 의류의 경우엔 기본 100코는 기본이고 200코 가까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목둘레부터 떠내려가는 스웨터의 경우엔 코를 잡는 순간부터 숫자를 세어 구획을 나눠야 한다. 본격적인 뜨개질이 시작되기도 전에 숫자에 압도 당한다. 본격적으로 선을 면으로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면 가로축과 세로축의 숫자를 모두 세어야 한다. 한 단 뜰 때마다 늘어나는 코의 갯수와 내가 지금 몇 번째 단을 뜨고 있는지 헤아려야 한다. 유튜브를 보거나 친구와 대화를 하며 무아지경으로 뜨다 정신차렸을 때, 내가 지금 몇 번째 단을 뜨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면 정말 난감하다. 이런 경우에는 도안에 표시도 안해 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과거의 내가 해둔 메모의 도움을 받을 수 조차 없다. 특히 꽈배기 무늬처럼 일정한 단 마다 무늬를 넣어야 하는 경우라면 순간 눈 앞이 새까매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어쩔수 없이 맨 첫 단 부터 한 단 한 단 세어 올라 와야 한다. 한번 세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를 믿지 못한다. 두번 째 세면 또 숫자가 달라진다. 최소 3번 혹은 그 이상을 세어 제일 많이 나온 숫자가 내가 떠올린 단의 수라고 여겨야 한다. 바늘에 걸린 코의 수 역시 한번에 완벽하게 세어본 적이 없다. 이 역시 셀 때마다 그 수가 다르게 나오기 때문에 몇 번씩 세어야 한다. 도안에 적힌 숫자와 동일하게 나오면 다행이지만, 여러번 세어봐도 다른 숫자가 나오면 또 다시 앞이 깜깜해 지는 것이다. 어디서 틀렸는지 눈에 불을 키고 한 코 한 코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어디까지나 취미 뜨개러이지 전문가가 아니라 수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바늘에서 코를 빼내어 오류가 생긴 부분까지 편물을 풀어내고 오류 수정 후에는 모든 코를 찾아내서 다시 바늘에 걸어 주어야 한다. 이 때가 가장 신중해야 할 시간이다. 바늘에 코가 하나라도 걸리지 않으면 숫자를 다시 세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편물 자체가 엉망이 된다. 온 신경을 집중해 바늘에 코를 걸고 숫자를 센다. 마지막 코를 바늘에 거는 순간 도안의 숫자와 내가 코를 주으며 센 숫자가 일치하는 것이 확인되고 내 귀에는 촌스러운 빵빠레 소리가 울려 퍼진다. 숫자때문에 겪은 어려움이 숫자때문에 느끼는 희열이 되는 것이다.



수학을 못해서 포기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 기회가 됬고, 더 이상 숫자와 얽히지 않은 삶을 살겠다고 여긴 순간 숫자로 첨철된 뜨개질이 취미가 되었다. 수포자가 숫자지옥 뜨개질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뜨개라는 행위가 주는 다양한 만족감때문일 것이다. 세상 모든 색의 실을 고르는 과정부터, 떠 내려간 편물의 보드라운 촉감, 점점 형태를 갖춰가는 편물, 마지막 꼬리 실을 정리하고 가위로 잘라내는 순간의 희열까지 뜨개라는 행위에 담긴 여러 동작 동작들이 중독을 만들어낸다. 내가 수를 세는 것에 지쳐 뜨개를 포기했다면 느끼지 못했을 기쁨들인 것이다. 한 때 가장 비탄의 감정을 느끼게 한 수학이 10년 뒤 이렇게 큰 기쁨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 내가 힘겹다 여긴 것들이 앞으로 10년 뒤 나에게는 행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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