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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세영 Sep 19. 2022

떡집에는 행복한 명절이 있다

몸이 힘들어도 마음만큼은 풍성하고 즐거울 수 있다.

 



 학창시절에는 꽉 막힌 고속도로 위에서 7시간 씩 걸려가며 시골 큰집에 간다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7시간 동안 아무 일 없이 무료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러웠다. 나는 전전날부터 장보는 엄마를 따라가 아들 없는 집 아들 노릇 한다고 박스로 사는 나물부터 제일 튼실한 과일까지 다 날라주고, 집에 돌아와선 딸 노릇 한다고 앞치마 메고 하루 종일 전을 부쳤다. 몇 살 차이 안나는 사촌 동생들이 거실을 운동장 삼아 뛰어 다니며 내가 힘들게 부쳐 놓은 전을 집어 먹어도 화내거나 짜증낼 수도 없었다. 그놈에 장손이 뭐라고 감히 여자애가 장손이 뛰어 놀다 배고파서 집어 드시는 일을 나무랄 수 없는 일이었다. 명절 전후로 늘어난 엄마의 짜증은 외면하기도 힘들었고 그렇다고 해서 받아주는 일 역시 10대 소녀에게 가혹한 일이었다.

 더욱이 집에서는 일 안해서 혼나는 일이 있었다면 모를까 아무리 일을 해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도와줘서 고맙다는 단 한마디의 말이면 족했는데 이조차도 충족되지 않았다. 오히려 해놓지 않은 일에 대한 구박과 타박이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일이 있었고 그 중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일은 내 생일에 벌어졌다. 내 생일은 벚꽃피는 춘삼월이지만 대학생이었던 당시의 나에겐 그저 중간고사 기간일 뿐이다. 지방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소한의 교양 수업과 최대한의 전공 수업으로 시간표를 채우던 나는 시험기간이면 가뜩이나 부족한 수면시간조차 채우지 못할 정도로 일정이 늘어났다. 조별과제, 개인과제, 시험공부의 쳇바퀴 속에 아르바이트 대타 일정까지 꾸겨 넣었다. 학교 앞에서 자영업 하시는 분들의 가장 큰 인력난은 방학이 아니라 시험기간일 것이다. 나 역시도 당시 일하던 도시락집에서 시험기간이라고 오늘 못나간다는 다른 아르바이트생을 대신해 일을 한 것이었다. 다들 공부하느라 밥먹으러 나올 시간 조차 없었던 것인지 주문은 끊임없이 들어왔고, 평소라면 마감을 해야 할 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일을 했다. 겨우겨우 마지막 주문을 마치고 홀청소와 주방마감을 하니 12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그때부터 다음날 지하철 첫 차가 출발하는 시간까지 시험공부를 했다. 보고서를 작성하고 ppt를 만들었다. 오전 다섯시 반,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첫 기차를 타고 집 근처 빵집에 도착하면 딱 8시 출근시간이다. 주말 알바까지 마치고 나면 오후 5시가 된다. 드디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고요한 집에서 미처 씻지도 못하고 잠에 들었지만 내 수면은 1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집에 있던 동생이 먹고 치우지 않은 상과 설거지거리를 내가 치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엄마의 고성이 나를 향한 것이었다. 생일이라고 집에 반드시 와야 한다는 말에 겨우 집에 도착해서 처음 들은 말이 바로 설거지도 안하는 나쁜년이었다. 설거지도 안하는 나쁜년은 동생인데 말이다. 나는 그 길로 집에서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돌아왔다. 엄마도 힘든 날이 있을테고 마침 그 힘든 날이 그 날이었을 뿐이라 생각하며 이해해보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생일 선물로 값비싼 선물을 바란것도 아니었고, 좋은 식당에서 하는 식사를 원한것도 아니었다. 그저 시험기간인데 일 까지 하느라 고생 많았다는 말 한 마디면 충분했다. 엄마도 분명 힘든 날이 있을테고 하필 그 날이 이 날이었을 뿐이라 여기며 이해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이후로 나는 가사 노동의 절정기인 명절에 집에 가지 않고 밖에서 일하는 것을 택하고 있다.

 



 20살 이후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가사노동과는 비슷한듯 조금 다른 노동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집에서 일하나 나가서 일하나 일하는 것은 똑같지만 나가서 일하면 적어도 노동의 댓가가 존재한다. 비단 수고했단 말뿐 아니라 수고에 비례한 금전적 보상까지 있었으니 지난 20년간 해온 가사노동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지금의 절반 수준도 안되는 최저 시급이었지만 일을 한 시간만큼 통장에 채워지는 액수는 명확하고 명쾌했다. 앞서 말한대로 명절과 시험기간은 나같은 사람에겐 알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대학교 근처에서 일 할 때에는 일하던 영업장 외에 친구가 대타를 부탁해서 명절 혹은 시험기간에만 특별 근무를 하기도 했다. 더욱이 이런 일정은 페이가 최소 1.5배 이상 주는 경우가 많아 단기간 근무로 목돈을 만들기 좋았다. 일해서 번 돈이지만 어쩐지 명절 보너스 받는 기분이었다.

 시험기간은 이제 대목이라고 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명절만큼은 여전히 나에게 대목이다. 더욱이 떡집에서 일한다면 말이다. 떡집의 가장 큰 대목은 단연코 추석이다. 산처럼 만들어 쌓아둔 송편은 쪄내기가 무섭게 팔려나가고 길게 늘어선 손님줄은 줄어들 생각을 안하는 날이다. 식사도 제때 못해 손님이 없는 틈을 타 허겁지겁 먹어야 하고 화장실 가는 것도 손님들이 빠진 찰나의 틈을 타 후다닥 다녀와야 한다. 더욱이 이 날은 사장님 형제분들과 그 자녀들까지 총출동 하는 날이다. 정확히 말하면 시외가댁 식구들의 총출동 날이다. 맞다. 나는 떡집 며느리이다. 사업주는 옆지기로 되어 있지만 사실상 떡집 운영에 관한 대부분의 일은 시엄마 손에서 이루어진다. 추석도 마찬가지이다. 어머님의 형제자매들과 조카들까지 온 식구들이 다 모여 떠들썩하게 장사를 한다. 전날 새벽부터 미리 준비해 둔 추석 장사 준비가 끝나는 추석 첫날 아침이 되면 식구들이 하나 둘 출근한다. 이미 벌써 일 할 준비를 마치고 들어오시는 시외삼촌들과 아직 잠이 눈 끝에 달린 사촌동생들이 익숙한 듯이 앞치마를 찾아 입고 각자 맡은 업무를 시작한다. 김이 펄펄 나는 송편이 종류별로 나오고 참기름 냄새는 온 동네에 퍼져나간다. 포장하는 손은 멈추지 못하고 판매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늘어나는 손님만큼 점점 더 커져간다. 잠시간 손님이 멎는 시간이 오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먼저 쉬라고 등을 떠밀고, 다른 사람이 손 대기 전에 매장 정리를 한다. 사촌동생들은 언니 힘들다며 자신들이 힘든 일을 다 도맡아 했고, 시부모님과 시외삼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날 예뻐해주신다. 틈틈히 오가는 이야기는 기분 좋고 즐거운 내용이 가득차 있다. 일은 힘들지만 웃음이 멈추지 않는 명절다운 명절이다.


 객관적인 업무 강도는 분명 집에서 명절 준비하는 것이 훨씬 쉽다. 그렇지만 내가 친정집에서 겪은 명절은 늘 힘들었다. 명절 내내 주방에선 불만과 투정의 소리가 들렸고 술에 잔뜩 취해 고주망태가 된 남자들이 가득했다. 명절을 지내고 나면 꼭 집안에는 고성방가가 오갔다.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 사이에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만 오갔다. 이것도 못해주냐는 소리와 이것조차 못하냐는 소리가 맞붙어 완벽한 불협화음이 되었다. 행복한 명절이 무엇인지 느껴버린 나는 올 추석에 친정에 가지 않았다. 옆지기는 뭐라도 사들고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슬쩍 내비쳤지만 나의 완고함을 이길 수는 없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나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기에 져준것이리라. 앞으로 남은 수십개의 명절에도 딱 지금만큼만 행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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