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마다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푸릇한 새싹이 올라오는 봄이면 쑥버무리, 무더운 여름엔 얼음 동동 띄운 콩국수,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이면 펄떡이는 대하, 날이 추워지는 겨울이 되면 군밤이다. 내게 군밤은 추운 겨울 몸을 녹이는 달큰한 간식일 뿐 아니라 온 식구들의 사랑으로 마음까지 녹여주는 음식이다.
길 막히는 도로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약밤 트럭이 보이면 주머니 속 꼬깃 꼬깃 넣어두었던 비상금을 턴다. 사실 그만큼 나는 원래부터도 밤을 참 좋아했다. 어린시절부터 그 지긋지긋한 제사가 끝나면 제일 먼저 봉투 들고 챙겨 넣었던게 밤이었다. 다른 사촌들이 약식이며 산적이며 들고 먹기 바쁠 때, 나는 생밤을 오독 오독 씹어 먹곤 했다. 그 날도 약밤을 한봉지 사 들고선 쉴새없이 까먹는 내 모습에 옆지기는 허허 웃으며 자긴 됬다며 많이 먹으라 해줬다. 내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나 뭐라나.
지난 추석에 옆지기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이모 삼촌들께서도 나를 먹여야 한다며 과일부터 고기까지 이것 저것 잔뜩 챙겨주셨다. 그 중 하나가 큰외삼촌깨서 어어어디 까지 가서 직접 따온 밤이었다. 구황작물은 묵혀 먹어야 더 맛나다는 소리를 듣고 냉장고 깊숙히 묻어 두었다. 날이 추워지면 먹으리라 훗날을 기약하며 말이다. 그 날이 오늘이다. 11월 30일이 되자 갑자기 내리 꽂는 기온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밤을 꺼내들었다. 이미 씻어서 주신것인지 반짝 반짝 윤이나는 밤을 물에 살짝 헹구어 불린다. 뒷꽁무니에 칼집을 내주고 예열해 둔 에어프라이어에 넣는다. 이제 기다림의 시간이다.
떡집에서 일한지가 벌써 몇년째인데 나는 여전히 뜨거운것을 잘 못만진다. 김 펄펄나는 시루를 번짝 번쩍 드는 옆지기에게 얼른 이 뜨거운 밤을 까달라고 슥 밀어본다. 역시 남이 까준 밤이 젤 맛나다. 내가 먹기 편하도록 밤을 까주는 옆지기를 보니 시엄마가 떠오른다. 시엄마는 가끔 가게로 밤을 삶아 오신다. 신문지를 깔고 시엄마는 밤을 까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옆에서 낼롬 낼롬 집어먹기만 한다. 몇 번 내가 까 먹겠다고 어머니 손에 들린 칼을 달라며 실랑이를 해도 어머님은 칼 들고 설치면 손다친다고 절대 내가 칼을 들게 하지 않으신다. 어머님 이번엔 제가 까드릴께요. 대신 좀 식혀서요.
군밤. 참 몸도 마음도 살찌우는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