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고학년 시절부터 나는 이면지를 사용했다. 매일 받는 가정통신문을 그냥 버리기 아까워 수학 문제 푸는 용도로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런 이면지 사용은 대학과 대학원을 포함한 모든 학창시절로 이어졌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교무실 청소를 주로 했다. 다른 곳의 청소보다 쉽다는 이유도 있었고, 선생님들에게 사랑받는 위치가 되는 것 같은 뿌듯함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면지와 문제집이었다. 교무실 청소를 하다보면 이면지를 잔뜩 얻을 수 있었고, 교사용으로 들어온 문제집도 받을 수 있었다. 이면지는 대부분 이미 지나가버린 학습자료로 해당 학기에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 이면지를 잔뜩 모아들고 다니며 연습장으로 사용했다. 수학문제를 풀기도 하고, 영어단어를 외울때 사용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이면지와 문제집을 받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공책이나 연습장을 많이 사지 않았다. 예쁘고 취향에 맞는 공책을 사는 것으로 학기를 시작하던 다른 친구들, 동기들과 다르게 나는 이면지가 들어가는 오래된 L자 파일 하나면 준비가 끝났다. 학과 사무실 앞에 가면 늘 이면지를 모아두는 함이 존재했다. 여기서 이면지를 모아 들고 다니며 필기도 하고 암기를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도 나의 이면지 사랑은 계속 되었다. 아날로그형 인간이라 태블릿으로 논문을 읽기 어려워 늘 프린트를 해야 하는데, 이때 사용하는 종이는 대부분 사무실에서 나오는 이면지이다. 새 종이에 프린트 하는 것은 늘 마음이 편치 않았던 차에 사무실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이면지를 사용하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내가 이면지를 사용하는 것은 비단 경제적인 이유 뿐만이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분명 경제적인 이유로 이면지를 사용을 시작한 것이 맞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지금까지도 이면지를 사용하는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다들 알고 있듯이 종이는 나무로 만든다. 벌목한 나무에 여러 공정이 더해지면 한 장의 종이가 완성된다. 전체 산림사업 중 40퍼센트 이상의 원목이 제지 산업에 사용되고 있다. 종이의 수요가 높아질 수록 파괴되는 산림의 면적은 넓어져만 간다. 덕분에 현재 남은 원시림은 수백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불법 벌목의 피해자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단순히 원시림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새로 나무를 심으면 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원시림은 하나의 유기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처가 되어 주고 있다. 벌목을 하면 이 동식물까지 연결된 사슬이 모두 끊어지는 것이다. 결국 종이 한 장을 위해 벌목하는 것은 전체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단지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 수 많은 연결 고리 중 하나의 사슬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내 사슬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딘가의 연결 고리 하나가 끊어지면 우리 역시도 무사하지 못한다.
내가 이면지를 사용하는 것은 단지 작은 시도에 불과하다. 다만 내 시도가 이 거대한 사슬을 끊어내는 것에 일조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