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복은 자신 없지만, 포기는 싫습니다.”
N포 세대라는 말이 나온 지도 꽤나 오래되었습니다. 이제는 청년들에게 무언가를 극복하라고 말하는 이가 많지 않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좋은 걸까요, 씁쓸한 걸까요. 청년기를 건너가고 있는 장애인으로서 이 질문에 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장애인으로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극복 패러다임’에 빠지기 쉽습니다.
‘장애를 극복하고...’, ‘장애를 이기고...’ 등과 같은 장애 극복 패러다임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감동적이고, 달콤하며, 사람을 달뜨게 합니다.
하지만 ‘극복’이란 게 그리 쉽게 되던가요? 마음먹는다고 간단히 플렉스할 수 있던가요?
저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장애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고, 또 굳이 극복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이런 류의 말을 듣는 게 불편했습니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한번 사는 거, 장애를 멋지게 극복해 봐. 베토벤처럼, 헬렌 켈러처럼, 김대중 대통령처럼, 장애를 이겨내고 멋지게 살아 보는 거야!’
세상에! 나는 평범한 시각장애인일 뿐인데, 왜 온갖 위인을 가져다 붙이는 거지? 의아했습니다. 또 무척이나 부담스러웠습니다.
‘한번 사는 거 경제적으로 성공해서 멋지게 살아보는 거예요. 이건희 회장님처럼, 빌 게이츠처럼!’
장애인인 제가 비장애인에게 이런 조언을 한다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요?
헬렌 켈러를 소환해서 장애 극복을 독려하는 것과, 빌 게이츠를 소환해서 경제적 성공을 독려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저는 알 듯 말 듯 의아했습니다.
그렇다면 ‘장애인’ 자리에 ‘청년’, ‘노인’, ‘여성’, ‘계약직’, ‘이주민’ 등을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컨대 ‘여성성을 극복하고...’, ‘노인이지만 ...를 이겨내고’, ‘비록 청년들의 현실이 녹록치 않지만 기성세대가 그러했듯 어려움을 극복해야...’, 상상만 해도 숨막히지 않습니까? 가히 폭력적이지 않나요?
최선을 다해 살아도 달디단 열매를 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불안해하시는 분들, 그리하여 자의 반 타의 반으로 N포를 선택하신 분들, ‘극복’과 ‘포기’ 혹은 ‘열정’과 ‘번아웃’ 사이를 줄타기하듯 살아가시는 분들께 이 책을 헌사합니다.
삶 앞에서, 극복은 자신 없지만 포기하기도 싫었던, 시각장애인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들을 통해 공감과 위안을 얻으실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사회의 중심부에 발붙이지 못한 채 주변인으로서 살아온 저의 인생 편린을 조근조근 들려드릴까 합니다. 장애인으로서, 청년으로서, 흑수저로서, 장삼이사로서 살아온 삶의 여정을 보여드릴까 합니다.
비록 장애를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을 비관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은, 때로는 게을렀고 때로는 최선을 다한 어느 시각장애인의 삶을 훔쳐본다고 생각하시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척박한 세상을 사금밭으로 알고 살아가는, 어느 시각장애인의 고군분투기. 지금부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