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삼열 Sep 27. 2023

어느 시각장애인의 정신과 방문기3

약효는 그닥이지만 일단 한번 드셔봐


  원장님이 전에 없이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우울증입니다.”

  “!”     


  아! 나는 우울증이었던 건가. 그래서 기운이 없고 무기력했던 건가. 우울증이라서 잠도 오지 않았겠지. 아! 급우울해지네.

  원장님이 부드럽게 입을 여셨다.   

  “정확히는 경도 우울증입니다. 검사 결과를 보면, 16점이 나왔어요. 그렇지만 우울증이라고 결론 내리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우울증이라고 진단 내리면, 선생님은 아마 ‘아, 나는 우울증이구나!’ 하고 생각하시게 되는데, 그건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정도 우울은 주위에서 흔하게 발견되기도 하고요.”

  칠흑같이 암담하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드는 느낌이었다. 

  봄바람 원장님, 혹시 정신의학계의 족집게(?), 숨은 고수(?)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원장님은 부처님 같지만 사실은 크리스천이고, 테스트 상으로는 경도 우울증이지만 굳이 그렇게 진단 내릴 필요는 없다는, 그런 말이었다.      


  어느새 진료 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봄바람 원장님은 ‘티아넵틴’이라는 약을 처방해주셨다. 아니, 우울증으로 진단하지 않겠다면서 정신과 약이라니, 정신과 약이라니... 나는 약 복용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브레인포그 아시죠? 코로나 후유증이요. 브레인포그에 사용할 목적으로 개발한 약입니다. 정신과 약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용량도 최저치로 처방했어요. 한번 드셔 보시죠.”

  “부작용은 없나요?”

  약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탓에, 내가 당황하며 물었다.    

  “부작용, 없습니다. 그 대신... 약효도 거의 없을 겁니다.”

  “?”

  약효가 없는데 그게 약이라고? 부처님 같은 크리스천이 약효가 그닥인 약을 주네.

  “용량이 낮으니까요. 그래도 한번 드셔 보시죠.”

  “약을 먹어야 할 정도인가요, 제가?”

  “드시지 않아도 됩니다. 입원해서 억지로 먹이는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한번 드셔보길 추천합니다.”

  특유의 봄바람 살랑대는 말투로 원장님이 말씀하셨다. 저렇게 가볍게, 부담 없이 말하면... 왠지 한번 먹어 보고 싶잖아. 나도 모르게 마음이 동했다. 그런데...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그 말인즉슨, 술 한잔하는 날이란 뜻이었다.

  “어디서 주워 들었는데, 정신과 약을 먹을 때에는 금주해야 한다고... 정말 그런가요?”

  “아뇨. 술, 드셔도 됩니다. 평소처럼 생활하시면서, 영양제 먹듯 이 약도 한번 드셔 보세요.”

  떨떠름한 표정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봄바람 원장님이 약을 광고하셨다. 아니, 적극적으로 권해주셨다. 약을 구명조끼에 비유하기도 하고, 갑옷에 빗대기도 하며, 열성적으로 추천해주셨다.   

   

  따스한 봄바람과 봄볕에 옷을 벗듯,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약에 대한 편견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잠에 대해서도, 약에 대해서도, 불안에 대해서도,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말고요. 뭐든지 여유 있게 바라봅시다.”

  봄바람 원장님의 마지막 이 말이 어쩐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그러고 보니, 봄바람 원장님... 나 때문에 식사도 하지 못하셨다. 나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진료실을 나왔다.         


  데스크에서 병원비를 계산했다. 검사 비용까지 다해서 약 4만 원가량을 결제했다.   

  원내 처방인 까닭에 약국에 갈 필요가 없었다. 데스크에서 바로 약을 받아 밖으로 나왔다. 

  한 시간 전과는 달리, 복도가 어수선했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갔다. 적요했던 병원과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에 나는 좀 얼떨떨했다.       


  마음이 시원섭섭했다. 무려 10년을 미루어 온 숙제를 마침내 끝낸 듯 후련하기도 했고, 정신과 진료 기록을 공식적으로 남겼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거창하게 말하면, 나는 지금 막 다리 하나를 건너온 셈이었다. 정신과 진료 이력이 없던 나와, 이력이 생겨버린 나. 다시는 다리 저편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 하지만 다리는 결국 건너라고 있는 거 아닌가?      

  인터넷에는 정신과 내원을 어렵게 만드는 루머들이 많았다. 형사사건에 휘말릴 경우 정신과 기록이 있으면 불리해진다, 신규 보험 가입이 불가능해지는 건 물론이고 기존 보험도 보험비 청구가 어려워진다, 직장에서 정신과 진료 이력을 들여다볼 수 있다 등등. 병원을 나오며 이런 잘못된 소문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뭐든지 여유 있게 생각합시다.’ 봄바람 살랑대던 말 또한 떠올렸다. 


  건물 밖으로 나왔다. 큰 시험을 치른 뒤처럼, 몸과 맘이 지쳐 있었다. 이제는 집에 돌아갈 일만 남았다.

  초행길인 만큼, 지하철을 타고 귀가할 자신이 없었다. 차비가 아깝기는 했지만, 나는 택시를 호출하기 위해 앱을 켰다. 돈을 지불해서라도 안락하고 싶었다. 오늘만큼은 그렇게 하고 싶었다.       


  현재 위치가 자동으로 설정되었다. IT 강국답게 위치가 아주 정확했다. 너무 정확해서 탈(?)이었다. 

  **정신건강의학과가 출발지로 찍혀 있었다. 나는 괜스레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출발지를 다른 상호로 바꿀까, 고민했다. 정신과에 대한 편견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구나, 또 한 번 자각했다.   

   

  잠시 고민한 끝에, 굳이 출발지를 바꾸지는 않았다. 출발지를 변경하는 것이 귀찮기도 했고, 왠지 부끄럽기도 했다. 타인에게 부끄러운 것보다,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게 언제나 더 씁쓸하기 마련이다.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싶어서 출발지를 그대로 놓아두었다.         

   

  다행히 가까운 거리에서 차가 잡혔다. 나는 기사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시각장애인입니다. 흰지팡이를 들고 **병원 앞에 서 있습니다.’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면, 보통은 택시가 바로 앞에 와서 정차한다. 물론, 이런 메시지를 보내도(혹은 전화해서 시각장애인임을 말해도) 엉뚱한 곳에 정차한 후 나에게 찾아올 것을 요구하는 기사님들도 있긴 하다. 그렇게 되면 웃픈 상황이 벌어진다. 시각장애인인 승객이 흰지팡이에 의지하여 비시각장애 기사님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행히 친절한 기사님이 병원 앞까지 잘 찾아와 주셨다. 누구에게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에게는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자, 아내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내는 10여 년 동안 내가 때때로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것을, 직장 일로 마음 고생해 온 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아 온 사람이었다. 그 기간 동안 아내는 내게 있어 훌륭한 상담사였다.     


  봄바람 원장님에 대해서, 진료 내용에 대해서, 그리고 받아온 약에 대해서 모두 털어놓고 공유했다. 아내답지 않게 얌전히 얘기를 들었다. 내과나 안과를 다녀왔을 때하고는 아무래도 집안 공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아내가 입을 열었다.

  "병원 다녀오느라 고생 많았겠다! 그런데... 다른 병원은 안 가 볼 거야?"  

  "?"       


  - 다음 편에서 계속   




이전 04화 어느 시각장애인의 정신과 방문기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