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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삼열 Oct 04. 2023

어느 시각장애인의 정신과 방문기5

Good News, Bad News


  봄바람 병원이 다이내믹하고 개성 있는(?) 곳이었다면, 새로 내원한 병원은 무척이나 친절하고 정석적인 병원이었다. 조금 과장하면 '병원의 이데아' 같은 곳이었다고나 할까.     


  내원 후, 곧바로 엄청난 양의 검사지가 휘리릭 날아들었다, 는 아니고, 꽤 많은 검사지를 들고 간호사님이 나를 조용한 방으로 데려가셨다. 

  내원하는 환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마련된 1인 대기실이라고 했다. 서너 평 정도 되는 공간에 컴퓨터와 소파까지 구비된 안락한 방이었다. 과 특성상 이런 밀폐된 대기실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원장님이 간호사님에게 검사지를 한 줄 한 줄 읽어주라고 당부하셨단다. 시각장애인이지만,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반드시 검사지를 풀어야 한다는 게 원장님의 생각이었다.

  검사지 작성은 약 30분 정도 걸렸다. 세 개의 검사지를 작성했는데, 봄바람 병원에서 작성한 바 있는 우울증 테스트를 먼저 했고, 범불안장애 검사지와 사회불안장애 검사지를 추가로 작성했다. 우울증 테스트는 익히 아는 내용이었고, 나머지 검사지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범불안장애 테스트

 · 지진이 일어날까봐 걱정되나요?

 · 폭발 사고가 일어날까봐 걱정되나요? 

 · 집 밖을 나갈 때, 문을 잠갔는지 수차례 확인하나요?

 · 밖(실외)에 나가는 것이 두려운가요?

 ·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질까봐 자주 초조한가요?

 (중략)


 ★ 사회불안 테스트

  · 여러 명이 모여 있는 장소에 뒤늦게 들어가기가 망설여지나요?

  · 낯선 사람에게 인사하기가 힘든가요?  타인이 보는 앞에서 글씨를 쓰는 게 부담스러운가요?

  ·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하는 게 두려운가요?

  · 공공장소에서 전화 통화하는 게 두려운가요? 

  ·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나요?

  · 긴장하면 얼굴이 쉽게 빨개지나요? 

 (중략)     


  간호사님은 싫은 기색 없이 검사지를 한 줄 한 줄 읽어 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데스크를 지켜야 하는 두 분 중 한 분이 내게 검사지를 낭독해 주신 까닭에, 다른 한 분이 매우 바쁘셨다고 한다. 이 자리를 빌려, 두 분 간호사님께 감사드린다.        

  검사지를 모두 작성한 후, 드디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여자 원장님께서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비 오는데, 오시느라 힘드셨죠? 저희 병원에 정말 잘 오셨어요!"

  여기저기에서 정신과 진료 후기를 읽어 보면, 내원 후 오히려 마음의 상처가 깊어졌다는 내용, 의사가 너무 차가웠다는 내용 등이 심심치 않게 보이는데, 내가 방문한 병원 두 곳은 그렇지 않아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봄바람 원장님께 그러했듯, 나는 여 원장님께 다시 한 번 고해 성사하듯 마음을 털어놓았다. 장애 교사로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스스로의 성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불면증 때문에 얼마나 불편한지 등을 가감 없이 말했다. 원장님은 중간 중간 질문하시며 경청해 주셨다.        

   

  30여 분 후, 이윽고 원장님이 입을 여셨다.   

  "검사 결과와 진료 내용 등을 종합해서, 선생님의 마음 상태를 진단 내리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진료실 창으로 빗소리가 새어들어왔다.    

  "일단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아, 오래된 클리셰! 굿 뉴스, 베드 뉴스!

  "좋은 소식부터 말씀드리면... 선생님의 마음은 비교적 건강합니다. 우울증도 없고요."

  나는 뜨악했다. 우울증이 없다고??? 봄바람 원장님, 어떻게 된 거죠? 전화해서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선생님은 우울감은 있지만 우울증은 없습니다."     


  원장님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랬다. 우울감은 살면서 누구나 쉽게 경험하는 감정이고, 우울증은 우울감이 오래 지속되거나 정도가 심해졌을 때 발병하는 질병이라고 한다. 다행히 나는 아직 우울증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좋지 못한 소식은... 선생님은 사회불안장애를 가지고 계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회불안 지수가 유의미하게 측정되었어요."

  사회불안장애. 말 그대로 사회생활이 버겁고 힘겨운 증상을 뜻한다. 특히 코로나19가 야기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고 다시 예전의 대면 사회로 돌아가면서, 최근 들어 이러한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아, 나는 불안장애였던 건가! 멍하게 앉아 원장님의 말을 곱씹고 있는데, 원장님이 이어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렇게 진단 내리지는 않겠습니다."

  이거... 어디선가 들어 본 말인데!  

  "환자가 스스로 사회불안장애라고 낙인 찍어 버리는 게,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인가요?"

  봄바람 원장님에게 주워 들은 말을 떠올리며, 내가 말했다.

  "잘 아시네요. 그런데 그것보다는..."

  원장님이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버겁지만 학교에서 일하고 계시고, 사회생활을 해 나아가고 계시지요?"

  원장님이 물으셨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버겁고 싫더라도, 참으면서 그 행위를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치료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데, 불안 때문에 그 일을 수행하지 못할 때입니다. 그건 치료 대상이 되고요. 선생님의 경우와는 다른 케이스라고 봐야겠지요. 그러니까 정리하면, 선생님은 사회불안장애를 경험하고 계시지만,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하거나 진단을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봄바람 병원에서와는 다른 진단 결과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우울증인지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불안장애이고, 사회생활이 힘들 때가 있겠지만 치료 대상은 아니라는... 그런 말이었다. 

  나는 '다른 검사가 더 필요하지는 않은가? 불면을 완화할 목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는 없는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추가 진료를 받아야 하나?' 등을 두서없이 원장님께 여쭈었다. 진료가 끝나가고 있었으므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원장님이 '아빌리파이'라는 약을 처방해 주셨다. 한동안 이 약을 복용하며 불안의 추이를 추적 관찰해 보자고 말씀하셨다.

  아빌리파이는 향정신성 약물계(?)의 스테디셀러이자 베스트셀러쯤 되는 약이다.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오래된 약으로서, 불안장애나 수면장애에도 폭넓게 처방된다고 한다. 한번 복약하기 시작하면 두세 달 정도는 꾸준히 먹는 게 좋다고, 그후 서서히 약 복용을 끊는 것이 보통이란다. 나는 이 약을 통해 마음이 조금 더 편안해지길 바랐다. 외줄타기하듯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온 스스로에게 한숨 돌릴 여유를 선물하고 싶었다.
  한편 진료를 마무리하며, 원장님이 클리계한 한마디를 남기셨다.    

  "용량이 최저치라서... 부작용도 없겠지만, 큰 약효도 없을 거예요. 일단 한번 드셔 보시고 2주 후에 봬요!"

  이분... 설마 봄바람 원장님과 아는 사이는 아니겠지? 너무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데! 나는 헛웃음을 참으며 인사하고,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가만 있자! 어떻게 진료비도 4만원으로 동일한 거지???          


  약국에서 약을 받은 후,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두 개의 진단. 비슷하면서도 꽤나 다른 진단 결과에 아내와 나는 대토론을 벌였다. 나는 우울증인가, 불안장애인가. 치료를 받을 것인가, 살던 대로 참고 살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어떻게... 꽃잎점이라도 쳐볼까?"

  아내가 말했다.

  꽃잎은 알려줄까, 나의 미래를?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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