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Day
“여보세요오?”
봄바람 원장님에게 전화를 받은 건, 초진 후 며칠 후였다. 다음 진료까지는 아직 열흘 이상 남아 있었다.
“왜 그렇게 당황하시죠오?”
특유의 봄바람 살랑대는 말투를 들었을 때 나는 몹시 당황했다.
‘원장님이 대체 무슨 일로 전화하신 거지? 설마, 내가 다른 정신과에 내원한 걸 알고 계신 건가? 그럴 리가!’
“약은 잘 드시고 계십니까?”
알고 보니 원장님은 나를 감시하기 위해, 아니, 내가 약 복용을 잘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전화하셨다. 정신과에서 약을 처음 받아간 환자들은 약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성실히 복약하지 않는 경우가 잦다고, 그래서 종종 약 복용을 독려하는 전화를 돌린다고 하셨다. 역시 이분... 전화 통화를 꽤나 좋아하는 것 같다.
유구무언.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리오. 나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버버했다. 다른 병원에 내원했다고, 그곳에서 새로운 약을 받아왔다고, 진단 결과가 조금 다르다고... 이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어영부영, 구렁이 담 넘어가듯 통화를 마쳤다. 웃픈 마음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난 며칠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며칠 전, 봄바람 병원에 다녀온 나에게 아내가 말했다.
“병원 다녀오느라 고생 많았겠다! 그런데... 다른 병원은 안 가 볼 거야?”
아내는 병원 쇼핑을 하자는 게 아니었다. 아내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얼핏 생각하면 어느 병원에서 안압을 재든 일관된 측정값이 나올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의사가 기계를 이용해서 수동으로 재다 보니 약간의 오차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정확한 안압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병원에 내원한 후, 비교적 정밀하게 안압을 측정하는 곳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듯 나에게 맞는, 혹은 진료를 잘하는 병원을 찾기 위해서는, 귀찮더라도 발품을 팔아야 하는 것이다.
치료 방향 및 약 복용 여부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확실히 두 번째 진료가 필요할 듯했다. 다른 병원에서도 같은 소견을 보인다면, 그건 누가 봐도 객관적인 진단이 될 터였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병원에 예약하기가 쉽지 않았다. 친절하고 진료를 잘한다고 입소문이 난 병원은 수일 내에 진료를 볼 수가 없었다.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대기해야 의사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다니, 놀라웠다.
일단 송파구에 위치한 유명한 병원으로 예약을 걸어 놓긴 했는데... 과연 두 달 뒤에 내가 그곳에 내원할지는 미지수였다. 솔직히 가지 않을 확률이 훨씬 컸다.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봄바람 병원에 정착(?)하게 되지 않을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당분간 약(티아넵틴)은 복용하지 않고 상황을 보기로 했다.
어둠이 커튼처럼 내리고, 분주했던 하루가 저물었다. 몸은 몹시 피곤했지만,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빗소리에 잠을 깼다. 비바람이 창틀을 흔들었고, 빗방울이 창을 투두둑 때렸다.
병원 관련 일로 마음이 어수선한 탓인지, 잠을 설친 탓인지, 출근 후에도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좀처럼 하지 않던 실수가 연이어 나왔다. 돌이켜 봐도, 참 우울한 날이었다.
첫 번째 실수. ‘싱크율 제로 수업!’
평소같지 않게 학생들이 갑자기 웅성거렸다.
“선생님, 슬라이드랑 수업 내용이랑 안 맞아요!”
그랬다. 나는 깜박 잊고 PPT의 슬라이드를 몇 페이지나 넘기지 않은 채 시 ‘진달래꽃’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예컨대 전자 칠판에는 ‘진달래꽃 2연’이 나오는데, 나는 혼자서 ‘4연’을 설명하고 있던 셈이었다. 전에 없던 실수였다.
부연 설명하면, 판서를 할 수 없는 나는 수업 전에 PPT 화면을 미리 만든 후, 수업에서 전자 칠판을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PPT 슬라이드를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슬라이드 내용을 보며 화면을 넘기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사전에 PPT 내용 및 화면 순서를 외우고, 수업에서는 교수·학습 내용에 맞게 슬라이드를 넘겨 가며 설명하는데, 아주 가끔은 이 싱크율이 맞지 않아 곤혹스럽다. 화면이 설명을 앞서갈 때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행여나 ‘시각장애인이라 저래!’라는 말을 듣게 될까봐, 혹은 이런 생각을 누군가 가지게 될까봐 나 나름대로는 몹시 신경을 쓰는데도, 가끔 싱크율 제로의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두 번째 실수. ‘교장입니다만!’
“선생님, 안녕하세요?”, 점심시간에 복도에서 누군가 나에게 인사했다.
“어, 안녕! 밥 먹었니?”, 하고 반갑게 대꾸했는데...
“허허허, 교장입니다!”
“!”
“괜찮습니다, 제 선생님!”
이런 대화(?)가 오갔다. 매일 듣다시피하는 교장 선생님의 음성을 어쩌자고 사춘기 소년의 그것으로 오해를 할 수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업무의 효율이 떨어졌나요?’, ‘평소와 다르게 집중이 잘 안 되나요?’, 전날의 검사지 내용이 머리를 스쳐갔다. 전에 없던 실수가 연이어 나오고, 병원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는지 모르겠고, 잠을 못 자서 피곤하고... 이대로 괜찮은 걸까. 봄바람 병원에서 받아온 약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다.
작다면 작은 문제들이 머릿속에서 구르고 굴러, 눈덩이같이 커지는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넉다운될 것 같은 하루가 느리게 느리게 지나고 있었다.
한편, 무려 두 달 뒤로 예약되어 있는 병원에서 전화가 온 건, 그날 퇴근께였다. 갑작스럽게 예약을 취소한 환자가 있어서, 바로 진료가 가능하다고 했다. 진료 시각은... 불과 30분 뒤였다.
‘안 좋은 일만 생기는... 게다가 비까지 오는... 오늘 같은 날, 낯선 병원에 가야 한다고?’
고민이 되었다. 과연 블루 데이의 화려(?)한 피날레를 목도하게 될지, 의외로 호사다마한 결과를 마주하게 될지,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두고 볼 일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택시를 호출한 후, 비바람이 부는 밖으로 나갔다. 가는 여름이 대지에 비를 세차게 뿌리고 있었다.
-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