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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삼열 Sep 24. 2023

어느 시각장애인의 정신과 방문기2

부처님을 닮은 크리스천이 진단을 내리다


  우리는 약 20분 정도 사전 진료(?), 티키타카(?), 백문백답(?) 뭐 그런 걸 했다. 기억나는 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말들이 오갔다.      


  봄바람: 결혼했나요?

  나: 네.

  봄바람: 어디서 만났고, 어떻게 결혼했나요?

  나: 대학 다닐 때 만났고 6, 7년 연애 끝에 결혼했어요. 

  봄바람: 6, 7년이요? 정확하지가 않네요. 저는 딱 3년 연애하고 결혼했어요. 아무튼 긴 연애 끝에 결혼했다는 건... 두 분 다 의리가 있다는 건데... 맞나요?

  나: 그, 그럴 수도요.

  봄바람: 대학은 어디 나왔죠?  

  나: **대요.

  봄바람: 저 거기 간 적 있어요.

  (중략)     


  봄바람: 취미는 뭐죠? 주말에 뭐해요?

  나: 독서하거나 글을 써요.

  봄바람: 책을 어떻게 읽죠? 안 보이는데?

  나: 요즈음은 시각장애인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전자도서를 쉽게 읽어요. 한번 보실래요? 이렇게요.

  봄바람: 신기하네요. 이렇게 글도 쓰고요?

  나: 책도 출간했어요.

  (중략)       


  봄바람: 하시는 일은 뭐죠?

  나: 중학교 교사예요. 국어를 가르쳐요. 

  봄바람: 아... 그래서 오셨구나... 학교 일, 많이 힘들죠? 요즈음 뉴스에도 자주 나오잖아요.  

  나: 개학 즈음해서는 잠을 잘 못 자요.

  봄바람: 제 딸도 그래요. 요즘 잠을 잘 못 자더라고요. 딸내미가 중2예요. 중학생들, 말 진짜 안 듣죠? 걔가 어제는...

  (중략)      


  물오른 대화를 끊은 건,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간호사님이었다. 마침내 병원에 불이 켜지고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잠들어 있던 병원이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스몰토크의 위력인가. 어느새 긴장은 온 데 간 데 없고 마음이 가벼웠다. 봄바람 원장님, 혹시 정신건강의학계에 고수일까. 두고 볼 일이었다.        


  원장님은 쫓기듯 진료실로 들어가 버리셨다. 나는 간호사님의 도움을 받아 인적사항 등을 작성한 후 문진표에 체크했다. 

  접수를 마친 후, 검사실로 이동했다. 진료를 보기 전에 기계를 이용해서 자율신경계를 검사한다고 했다. 이 검사를 통해 몸의 긴장도, 불안 정도, 피로도, 스트레스 정도 등을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심전도를 검사할 때처럼 팔목과 발목 등에 페드를 붙인 채 몇 분가량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었다.      


  검사를 하는 동안 간호사님이 기계 자랑(?)을 조금 하셨다. 대학병원에서도 활용할 만큼 신뢰할 수 있는 기계라고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그냥 인바디 같은데!’ 하고 생각했다. 내가 무식해서 그런 거겠지.    

   

  교육통계를 배울 때 주워 들은 말이 있다. ‘어떤 검사 도구의 타당도가 높다면 그 검사 도구의 신뢰도 또한 높다. 그렇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가 그것이다. 예컨대 사람의 지능을 측정하기 위해 공인된 지능검사 도구를 활용한다고 할 때, 그 검사 결과는 타당하고 신뢰할 만하다. 그러나 사람의 지능을 측정하기 위해 정밀한 자를 가져와서 사람의 머리 크기를 잰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측정 결과(머리 크기를 수치화한 것)는 매우 신뢰할 만하지만, 검사의 타당도(측정값이 목적에 부합하는 정도)는 매우 떨어지게 된다. 

  간호사님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편안히 앉아 있으라고 했는데, 인바디를 닮은 자율신경계 검사를 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사람이 의심이 많으면 안 되는데, 나는 어쩌자고 첨단 의학 기계(?)를 불신하지?     

    

  이윽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정신과 진료실에 처음 들어가 보는 건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솔직히 편안하기까지 했다. 봄바람의 위력인가 보았다.     


  봄바람 원장님이 자율신경계 검사 결과를 알려주셨다. 결과를 요약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고 전반적으로 자율신경계가 약해져 있지만,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공황장애 같은 비교적 큰 문제가 있다면 인바디 검사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하시며, 일단 인바디 검사상 그런 문제는 없는 듯하니 안심하라고 말씀하셨다. 아! 인바디가 아니고! 자율신경계 검사.     



  “그럼, 저희 병원에 내원하신 가장 큰 이유는 뭔가요?”       

  원장님이 물으셨다. 나는 망설임 없이,

  “친절하게 전화까지 해주셨으니까요.”   

  “아뇨, 그거 말고, 가장 불편한 증상을 말씀해 주세요.”

  나는 개학과 불면의 상관관계를 털어놓았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장애를 가진 채 사는 것에서 오는 불안 등을 가감 없이 말했다.

  그리고 10년 동안 다그쳐 온 마음에 약을 발라 주고 싶다고, 위로의 말을 다정히 건네고 싶다고, 불화했던 나에게 악수를 청하고 싶다고, 고해 성사하듯 털어놓았다.     

  원장님은 타이핑하며 내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셨다.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우울증 테스트를 해볼까요?”

  “읽을 수 없는데 어떻게 검사하나요?”

  “말로 하면 되지요. 제가 읽어 드릴 테니, 듣고 대답해 주세요.”     


  대략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Q: 잠이 잘 안 오나?

  A: 그렇다. 

  Q: 이유 없이 호흡이 가빠올 때가 있나?

  A: 아니다.

  Q: 이유 없이 심장이 빨리 뛸 때가 있나?

  A: 그렇다.

  Q: 자기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느끼나?

  A: 아니다.

  Q: 삶을 사는 것이 벌을 받는 것처럼 여겨지나?

  A: 아니다.             

  이 질문을 읽은 후, 원장님은 성서에 나오는 욥에 대해 한동안 설교하셨다. 욥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인물로서, 가혹한 시련을 이겨내고 신을 향한 믿음을 굳게 지켜낸... 고통과 인내의 아이콘이라고 한다. 나는 왠지 ‘아멘!’이라고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여담이지만, **병원 후기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원장님이 워낙 부처님 같으세요. 웃상이시고요.’

  그랬다. 봄바람 원장님은 부처님을 닮은 크리스천이었다!        


  Q: 식욕이나 성욕이 예전보다 감소하였나?

  A: 아니다. 

  Q: 예전보다 업무에 집중하기가 힘드나?

  A: 그렇다.

  Q: 자살 충동을 느낄 때가 있나?

  A: 아니다.

  Q: 삶의 의미가 없다고 자주 느끼나? 

  A: 그렇다.

  (중략)         


  검사가 끝났다. 원장님이 전에 없이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우울증입니다.”

     “!”


-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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