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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삼열 Sep 19. 2023

빗속의 엘리제

여름은 끝나도 상흔은 남는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를 말해 보려 한다. 노스트라다무스와 사오정이 나란히 유행했던 그때는 바야흐로 세기말이었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은 무척이나 오래된 빌라 2층에 세 들어 살았다. 1층 집이 반지하였으므로, 사실상 우리집이 1층이나 다름없었다. 말하자면, 꼭 그해가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빗물에 잠기고야 말았을 그런 집이었다.


  경기북부에 유례없던 폭우가 쏟아진 그 여름, 나는 피아노 학원 창가에 기대어, 우리집이 빗물에 조금씩 젖어드는 것을, 서서히 빗물에 잠겨 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빗물에 허물어지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았다.


  피아노 학원은 우리집 맞은편 건물 3층에 있었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서너 살가량 적은 분이 원장 선생님이셨다. 지금 생각하면, 시각장애인인 나를 가르치기 위해 많이 연구하고 고민하셨던 것 같다. ‘너는 악보를 볼 수 없는 대신 절대 음감을 가졌어. 그러니까 노력하면 나보다 더 좋은 연주를 할 수 있을 거야. 듣고 있니?’라고 자주 말씀하셨는데, 그건 나를 향한 응원이자, 피아노 배우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강권이기도 했다. 매일같이 피아노 연습실 창가에 붙어 서서 집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아이라니... 그분한테 나는 어떤 원생이었을까.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인생에서 딱 한 번뿐인 6학년의 여름 방학을 나는 가사도 모른 채 마이클 잭슨을 들으며, 의미도 모른 채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으며 보냈다. 돌이켜 보면 비눗방울처럼 몽글몽글한 동시에 후~ 불면 사라지고 말 거짓말 같은 나날이었다. 아침부터 쏟아붓기 시작한 장맛비는 저녁나절이 되어서까지 그칠 줄을 몰랐다. 나는 체르니며 소나타며 하농 들이 든 학원 가방을 들고 피아노 학원으로 향했다.


  나를 또 다시 연습실 창가에 붙어 서게 한 건, ‘팝송 말고, 엘리제를 위하여를 쳐야지... 듣고 있니?’ 하는 원장 선생님의 잔소리였을 수도 있고, 집에 두고 온 채털리 부인이었을 수도 있고,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물론 생각이 나지만 비 오는 날에는 더 더욱 생각나는 어느 소녀였을 수도 있고, 그냥 그 모든 것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 이유일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부쩍 심해진 가정불화 같은 거. 아무튼 나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엘리제를 위할 마음 따위 조금도 없었다.


  열린 창으로 빗방울이 후드득 들어왔다. 빗물이 지표면에 상당히 많이 고여 있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고인 물 위에 몸을 포개면서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소리를 냈다. 평소와 다르게 학원이, 골목이, 도로가 적막했다. 세상이 온통 빗소리로 가득차버린 것 같았다. 나는 어쩐지 어수선해 보이는 학원 선생님들 눈을 피해 슬그머니 학원을 빠져나왔다.


  임진강이 범람한 건 그날 자정께였다. 그때만 해도 재난 경보 시스템이 아예 없거나 유명무실했기 때문에, 범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그리고 신속하게 그리하여 치명적으로 진행되었다. 좁은 골목을 가득 메운 어른들은 우왕좌왕했고, 아이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칭얼댔으며, TV나 라디오는 제대로 된 소식을 전해 주지 못했다.


  밀려드는 물을 피해 집을 나오기 전, 나는 어른들을 따라 가재도구를 의자며 책상같이 높은 곳에 올렸다. 마이클 잭슨 위에 서태지를 얹고, 채털리 부인 위에 안도현을 쌓아 올리는 식이었다. 그 위태롭고 살풍경한 모습을 뒤로하고 나오며, 나는 어쩐지 이 광경을 마음속 깊이 담아 두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날 밤 우리 가족이 골목에서 원장 선생님을 만난 건 실로 큰 행운이었다. 학원이 걱정되어서 오신 원장님은 그 난리통에도 내 이름을 크게 부르셨다.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해 학원 문을 열어주셨다. 그 덕에 우리는 체육관이나 피난 대피소 같은 곳에 가지 않아도 되었고, 근 2주가량을 그나마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아침이 밝았을 때, 우리집은 천장까지 물에 잠겨 있었다. 빗물은 빌라 3층에서 넘실거렸다. 물이 빠지는 데에도 한참이 걸릴 듯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따라 내 안에서 무언가가 자꾸만 밑으로 밑으로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잘 가, 서태지. 잘 가, 안도현. 잘 가, 나의 유년의 끝자락!


  그런데 애석하게도 빗물에 쓸려 가 버린 건 이게 다가 아니었다. 수해가 기폭제가 되어, 부모님은 끝내 각자 갈 길을 가기로 하셨고, 그렇게 아버지는 내 곁을 떠나갔다. 안녕, 아버지.


  안 좋은 일은 항상 떼지어 다닌다고들 하는데, 그건 어쩌면 ‘안 좋은 일’이 나름대로 우리를 배려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아플 거면 한 방에 아파버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으니까. 때린 데를 계속 때리면 무감각해지듯, 한꺼번에 몰려드는 아픔은 어느 순간 사람을 좀 멍하게 만든다. 그렇게 견뎌내는 한 시절이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침수되었던 집을 정리하자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렸어야 하지만, 나는 고양이보다 못한 처지였으므로 학원에 그냥 앉아 있었다. 아니, 그냥 앉아 있던 건 아니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엘리제를 위해 볼 요량으로 ‘엘리제를 위하여’를 열심히 연주했다. 언제부턴가 엘리제는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었다. 우습지만 정말 그랬다. 그녀는 내 마음속에서 비에 흠뻑 젖은 채 기도했고, 나는 그런 그녀를 위하는 마음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수해 복구가 한창이던 그 무렵, 피아노와 엘리제와 나는 유약하고 무력했다. 그 여름, 나는 엘리제를 위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위했다.


  원장님. 원장님은 안타깝게도 내 연주를 듣지 못하셨다. 당신 집을 손보시느라 학원에 들를 짬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조금 서운했다. 그 후 원장님과는 좀처럼 마주칠 일이 없었다. 우리가 이사한 게 먼저인지, 학원이 사라진 게 먼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인생의 1막이 부지불식간에 내려가 버렸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자명한 사실 앞에서 나는 서늘함을 느꼈다. 


  세기말도 밀레니엄도 옛것이 되어버린 이 여름, 또 다시 비는 내리고, 이름 모를 엘리제는 어디선가 비를 맞으며 기도할 텐데, 과연 우리는 그녀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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