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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상엽 Jan 06. 2019

'위임'이라는 환상 혹은 이를 위한 최소한의 전제 조건

리더십을 다룬 대부분의 텍스트들이 의사결정에 있어 위임의 중요성을 말한다. 구성원들을 신뢰하고 그들에게 많은 권한과 책임을 위임하는 것이 사업의 성공을 이끈다는 식이다. 나는 이런 주장에 대해 대체로 회의적이고, 매우 엄격한 조건을 전제로 하는 제한적인 위임에만 찬성하는 편이다.


모든 결정은 성공에 따르는 보상과 실패에 대한 책임을 수반한다. 따라서 성공했을 때 보상 받고, 실패했을 때 책임지는 사람이 결정을 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자영업에서는 가게 주인이 될 것이며 주식회사에서는 주주가 이에 해당한다. 모든 주주가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주주들은 이사회에 회사의 주요한 의사결정을 위임하며, 이사회는 또한 대표이사를 선임해 일상적인 경영상의 의사결정들을 위임한다. 주주가 아닌 이, 즉 전문경영인이 대표이사로 선임되는 경우도 있으나 한국에서는, 특히 비상장의 초기기업에서는 창업자이며 대주주인 이가 주주들로부터 이사회의 의장과 대표이사의 권한을 위임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꽤 자연스러운 결정이라고 본다. 가장 지분을 많이 가진 이가 결정의 성공과 실패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으며, 따라서 그의 이해관계에 상응하는 결정이라면 회사 전체의 이해관계에 대체로 부합할 것이고, 회사의 상황에 따라 수많은 변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작고 구조가 단순한 초기기업으로 한정할 경우, 회사가 잘 되면 소수 지분을 가진 다른 주주를 포함한 대부분 주주의 이해관계에 대체로 부합한다고 봐도 크게 틀리진 않기 때문이다.  


나는 회사에 단 한 명의 의사결정권자만 존재한다고 믿기도 한다. 회사의 최종적인 의사결정권자는 많은 경우 대표이사일텐데, 만약 그 대표이사가 창업자이고 대주주이고 이사회의 의장이라면 그가 유일한 단 한 사람의 의사결정권자여야 하는 당위로 충분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임직원들은 그로부터 제한된 권한을 위임 받아 행사한다. 내가 회사에서 일할 때, 특히 의사결정 및 위임과 관련해 적용하는 가장 기본 철학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판단과 믿음들은 많은 경우에 도전 받는다.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일을 하며 다양한 갈등과 반대를 경험하다보면, "잘 안되면 내가 책임지면 될 거 아니예요." 라는 말이 목구멍 직전까지 차오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 말을 입 밖으로 뱉어 내지 않는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내가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의 무엇이 잘 되지 않았을 때 피고용인이 감당해야 할 최악의 결과는 실직이다. 망한 회사의 직원이었다는 주홍글씨가 구직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겠으나, 요즘에는 실패의 경험을 높게 사는 회사와 리더들이 많고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이니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일해왔고 그 결과 어느 정도의 성취를 만들어냈다면 다른 일을 구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게 전부다. 징계나 감봉을 받으면 책임지는 것인가, 회사를 그만두면 책임지는 것인가. 그럴리 없다. 그것은 오히려 내게 부여된 아주 작은 책임을 회피하는 가장 쉬운 길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어떤 위임의 결과 조차 결국 주주의 책임이며 또한 주주로부터 총체적인 권한을 위임받은 자, 즉 대표이사의 책임이다. 따라서 그 최종적이고 유일한 의사결정권자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위임을 할지 하지 않을지, 한다면 그 위임의 대상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을 위임할 수 있는지 등은 온전히 그의 결정이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위임이 가능할까. 위임의 대상이 스스로에게 주어진 권한과 책임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지 충분히(=끊임 없이, 지속적으로) 평가하고 또한 검증해야 한다. 회사로부터 어떤 권한을 위임 받아 작은 조직을 꾸려가고 있는 나 조차도 나에게 스스로의 역량과 의지, 건강한 직업 윤리를 증명하지 않은 동료에게는 단 한 줌의 권한도 위임하지 않으며 중간중간 서로 약속한 방식으로 합의한 범위 내에서 위임된 권한이 작동되고 있는지 확인한다. 역량과 성장 잠재력을 지닌 사람을 채용하고, 그가 계속 성장하도록 도와야 하는 이유 또한 어쩌면 보다 많은 것을 위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특히 경험이 일천한 주니어일수록 이런 중요한 전제를 무시하고 단지 '위임'이라는 단어 하나에만 집착하는 경우를 본다. 나는 회사가 위임을 상시화 하고 그 범위를 확대하려면 채용 조건을 구체화 하고 그 기준을 아주 극단적으로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사와 대척점에 있는, 보다 많은 위임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동기부여를 원하는 각각의 임직원은 공정하고 어려운 채용 과정을 수용하고, 채용된 이후에도 회사가 부여하는 크고 작은 도전에 기꺼이 임해 과정과 성취를 만들어내면서 스스로 뭔가 위임받을 역량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믿는다. 일정 기간 동안 수 차례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증명하는데 실패했다면 다른 자리를 찾아야 하고, 매니저도 해당 직원에게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본인이 더 기여하고 성장할 수 있는 조직 또는 회사를 찾도록 도와야 한다. 필요한 사람을 채용하는 것 못지 않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그의 성과에 대해 냉정하게 피드백을 주고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돕는 일도, 회사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은 사람이 해내야 할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당신은 정말 정교한, 그리고 높은 기준으로 사람을 채용하고 있는가. 또 다른 당신은 스스로 원하는 수준의 의사결정권을 위임받을 만큼 뛰어나며 스스로의 역량을 과정과 결과로 증명하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은 선의에서 출발한 인간적인 믿음(또는 도박이라 말하고 싶다)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높은 기준들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극단적으로 높은 채용의 기준, 극단적으로 높은 나 스스로에 대한 기준.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위임의 엄격한 전제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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