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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홍콩 가다

- 안개 속의 스카이 테라스, 스타 트램을 타고 침사추이로 건너가다.

또 멀리 날아가 본다. 국경 밖으로. 그것은 새로운 국적을 얻는 일탈적 행위.



오랫동안 내 마음속 로망의 도시. 홍콩. 

주윤발의 바바리 액션과 무차별 속사포의 아우라. 장국영의 안개꽃이 핀 듯한 우울의 눈동자. 

그리고 공중전화 박스 속에서의 '사랑해'라는 메마른 목소리.

그리하여 왕조현의 청순미가 홍콩섬의 깊고 좁은 골목길 속에서 떠돌고 있을 망고의 향기를 맡고 싶었다.


쉴 새 없이 까르륵 웃고 있는 젊은 처녀들의 함박웃음과 수다 속에서 비행기는 한없이 높고 멀리 바다 위를 부유했다. 이후 착륙 예고 방송과 함께 차창 밖으로 수직으로 뻗은 고층 아파트가 보이고 흐린 구름 속으로 짙푸른 바다가 보였다. 


모든 여행의 시작은 공항에서 호텔까지의 이동이다. 나는 또 무사히 오늘 밤 잠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까? 공항에서 옥토퍼스 카드를 구입하고 초스피드 AEL을 탑승했다.

역시 종착역인 홍콩역에 도착해서도 혼돈 상태는 계속된다. 목적지는 셩완역이지만 환승역을 찾기란 쉽지 않다. 어쩔 수 없다. 무조건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하늘을 봐야 방향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알쏭달쏭하면 무조건 택시를 타야 한다. 빨간 택시를 타고 어설프게 호텔 이름을 말한다.

택시는 이리저리 달리며 경사진 길을 오르고 또 오르더니 호텔 앞에 정차했다.

숙소는 아일랜드 퍼시픽 호텔. 

아일랜드 퍼시픽 호텔에서 바라본 홍콩섬 일대


여느 호텔과 달리 천장은 높다.

바닥은 카펫을 깔아 실내가 부드럽다.

화장실은 대리석으로 부분 마감하여 귀족스러운 느낌이 들고 엷은 커튼을 열고 바라보자 높이가 가늘고 폭이  좁은 아파트들이 장대처럼 하늘로 솟구쳐 있다.

그리고 흐린 안개가 산 위에서 내려와 빼곡한 빌딩을 애무하며 공중에서 흩어지고 있다.


배가 고프다. 

무쇠라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배고픔이다. 무조건 호텔로 식당으로 달려가 손짓, 발짓으로 식사가 가능한지 물어보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만 되돌아온다. 

할 수 없이 바깥으로 나와 길거리를 걷는다.

작고 소담한 음식점들이 연달아 있다. 온통 중국 글씨뿐이다. 그중 만만한 국숫집으로 들어가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자마자 맛과 향도 느끼지 못한 채 허겁지겁 씹어 먹었다. 

한결 배 안이 따듯해지며 행복해진다.


자, 이제 홍콩의 상징인 트램을 탈 시간이다. 도로 중앙에 승탑장이 있다. 아주 오래전 깔아놓은 레일을 따라 트램이 상하 방향으로 탱크 소리를 내며 바삐 움직이고 있다.

온몸이 광고판으로 둘러싸인 트램이 쉴 새 없이 손님을 받고 토해낸다. 이층으로 올라갔다. 

딱딱한 의자. 상하로 여닫는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밀려왔다. 

호텔 근처 트램 정거장과 트램 실내 모습


이층에서 바라보는 셩완의 거리는 홍콩의 모습 그 자체이다. 

도로 주변으로 다양한 해산물을 말린 것과 발목이 잘린 네 발 짐승의 허벅지가 쇠꼬챙이에 꽂혀 있다.

아파트의 베란다에는 하얀 빨래들이 문패처럼 매달려 있다. 

건물은 높지만 도로와 인도는 좁다. 사람들이 교통 신호등을 무시한 채 무단횡단을 한다. 

단지 몇 걸음으로 건널 수 있는 좁고 좁은 도로이다.

나는 트램을 타는 순간 홍콩인이 되었다. 그만큼 트램은 홍콩 문화 그 자체이다. 트램은 관람용이 아닌 체험용 문화이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혹은 영화에서 고풍스럽게 종로거리를 달리던 낭만 전차를 홍콩에서 직접 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트램은 뼈대만 남은 고래의 근골처럼 몇 개의 쇠 파이프가 상하로 연결돼 있고 1층과 2층의 의자는 극히 딱딱하다. 아무런 편의 장치가 없다. 그 옛날 그대로의 운전대와 녹슨 부품들이 그대로이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이층 버스는 거친 바람을 일으키며 쏜살같이 사라져 가고 도로에는 빨간 택시와 배달용 오토바이가 씽씽 달린다. 인도에는 학교를 마친 학생이 무거운 가방을 메고 집으로 간다. 

나는 센트럴로 가고 있다. 나는 그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길을 알지 못하면 온 몸의 감각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때 모든 풍경이 내게 다가온다.

트램은 구간을 무채 썰듯 짧게 짧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점차 낡은 콘크리이트 외벽이 뒷전으로 물러나고 먹구름을 담은 큰 유리창이 하늘을 비추고 있다. 

나는 직감적으로 시내 중심에 들어 선 것임을 알고 앞문으로 내렸다.

센트럴 역에서 내려 페리 선착장으로 가는 길 주변 풍경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홍콩의 모든 것을 눈에 담는다. 눈으로 들어온 장면은 머릿속의 기억으로 잠깐 머물다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기억은 추억이 될 것이다. 

나는 스타 트램을 타기 위해 15c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역시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몸의 감각을 믿고 걷다 보면 목적지는 나온다. 

나는 페리 선착장으로 이어진 도로 위의 원통형의 길을 따라 나아간다. 옷 맵시가 아주 좋은 젊은 이들이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걸어간다. 거리의 악사들은 음악을 연주하고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간다. 

기타 박스 안에 몇 장의 홍콩달러가 보인다. 

주변 ifc몰과 애플 센터에는 인산인해이다. 발걸음은 선착장으로 향하지만 눈은 사방팔방으로 돌아간다. 


아찔한 수직형의 건물. 넓고 좁은 사각형. 또는 원뿔 모양의 랜드마크. 둥글고 둥근 대관람차가 공중에 정지돼 있다. 날은 흐리고 오후는 안개 투성이다.


페리 선착장은 센트럴 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멀리 맞은편 구룡반도가 보인다. 

홍콩섬 사이의 바다는 배들의 길이며 그 아래에는 지하철의 길이다.

나는 버스를 타고 다시 시내 중심으로 들어갔다. 굳이 버스를 타러 선착장까지 갈 필요가 없었는데 라는 후회가 올라왔다. 그러나 여행은 두발로 낯선 곳으로 찾아가지 않으면 자기만의 추억을 만들기 쉽지 않다. 

버스는 경사진 곳으로 거침없이 달리더니 대략 10분 만에 정차했다.

피크 트램역은 소란스러웠다. 나는 미리 예매한 승차권을 제시하고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길게 이어진 줄과 줄. 이윽고 터널 밖에서 피크트램이 들어왔다. 한 무리의 관광객이 내리자 또 다른 승객들이 탑승한다. 


이미 전망 좋은 우측은 빈자리가 없다. 한쪽 구석에서는 한국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양한 국적의 언어가 트램 안에서 메아리친다. 처음 25도의 기울기에서 출발하더니 이내 60도 이상의 가파른 경사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몸 전체가 뒤로 쏠리고 주변의 맨션아파트와 열대성 식물들도 비스듬히 누워있다. 여행객들의 시선은 대부분 오른쪽 창으로 향했지만 보이는 것은 낮은 풀더미와 콘크리이트 벽뿐. 

오르면 오를수록 흐린 날의 안개는 풀 숲에서 구름 사탕처럼 일어났다. 그 외 더 이상 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피크 트램 승차역과 지천에 깔린 스카이 테리스의 안개들


대략 15분 정도 올라갔을까. 

정상 부분은 이미 무진의 안개 이상이다. 일순 사람들은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홍콩섬의 창공으로 뻗은 마천루와 구룡반도 사이로 흐르는 빅토리아만의 풍경은 전혀 볼 수 없다.

역시 스카이 테라스 전망대는 무의미했다. 

여느 관광명소처럼 기념품 가게들과 음식점들이 안갯속에서 붉게 반짝거릴 뿐이다. 


나는 스카이 테라스 전망대를 나와 안갯속을 걸었다. 바다의 습기를 품은 축축한 느낌의 안개. 동쪽의 반도에서 날아온 고독의 여행객에게 안개는 방해꾼에 불과했다.


나는 편의점에 들어가 중국 맥주를 사서 마시며 또 안개를 마셨다. 이내 맥주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며 풍경은 더욱 몽롱해졌다. 나는  다시 내려가기 위해 15번 버스를 탔다. 

이층 버스는 예전 속리산 말띠 고개를 내려가듯 뱀 허리 모양을 그리며 거침없이 달렸다.

이층에서 바라본 홍콩은 간혹 안갯속에서 희미한 불빛들만 내보였다. 산 허리 군데군데 고급빌라들도 보였다.

대략 30분 정도를 달렸을까. 버스는 센트럴 지역으로 내려와 페리 선착장에 있는 정류장으로 되돌아왔다.


벌써 홍콩의 하루는 저물고 하늘은 어두워졌다. 그러나 이때부터 홍콩의 밤은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마음도 어느새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보다 새로운 것에 대한 즐거움과 흥겨움으로 가득 찼다.

나는 곧장 스타페리를 탈 수 있는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빅토리아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몸을 흔들었다. 

주변에서는 홍콩의 연인들이 맥주를 마시며 구룡반도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선착장에서 스타페리 승차권을 구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승선했다. 

스타 페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구룡반도와 홍콩섬을 왕래한 바다 위의 낙타와 같았다. 낡고 허름했지만 안전하고 견고해 보였다. 

이곳의 스타 페리는 단순한 유람선이 아니라 홍콩인들에게 또 하나의 대중교통수단이다.

스타 페리에서 바라본 홍콩섬


스타 페리는 천천히 움직였다. 오늘 하루 동안 국내 버스와 비행기, 지하철, 버스 트램, 피크 트램 그리고 스타페리까지 하늘과 지상, 땅 밑, 바다 위, 철로 등을 달렸다. 


센트럴에서 멀어질수록 홍콩섬은 아름다웠다. 마천루의 유리창 불빛들이 거대한 탑들을 이루고 붉고 푸른 조명들이 마천루의 몸에 호화로운 연회복을 입히고 있었다. 


밤하늘에는 화려한 조명들이 번개를 치고 있었다. 

빅토리아만의 물결 속에는 공중에서 추락한 휘황찬란한 불빛의 조각이 떨어져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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