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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

- 나혜석 지음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서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가 텅 빈 나는 미래로 나가자



1927년 6월 21일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소식을 전한다.

여류화가 나혜석 씨는 예술의 왕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동서양 각국의 그림을 시찰하고자 오는 22일 밤 105분 차로 경성역을 떠나 1년 반 동안 세계를 일주할 예정으로 오늘 오전 7시 45분 경부선 열차로 동래 자택을 출발하여 경성에 도착......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은 1927년 부산역에서 출발하여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조선 여성 최초로 첫 세계일주를 떠난다. 소비에트 러시아를 비롯하여 프랑스와 스위스, 독일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각지뿐만 아니라 미국까지 유람하며 각 나라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탐방한다.

나혜석 자화상

세기말적 격변지였던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를 여성의 몸으로 꿰뚫고 유럽으로 날아간 나혜석.


혼란한 국제 정세 속에서 연약한 조선 여성이 유럽행 횡단 열차를 타고 들려주는 이야기는 참으로 소중한 목격담이다.  좀처럼 찾기 힘든 1920년대의 여행 기록물을 만날 수 있다는 자체가 이 책의 절대적인 가치이다.


예술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문화 공간이 주요 탐방지였지만  각 나라의 풍경과 그에 대한 인상,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사를 한치도 놓치지 않고 문장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특히 각 지역의 여성들에 대한 외양과 생활방식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조선 여성과 대비되는 유럽 여성의 부러운 모습을 잘 들려주고 있다.


또한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난 영친왕과의 만남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를 소개하며 망국민의 서러움을 역사적 사실과 함께 소개하고 있어 당시 시대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나혜석의 파리 풍경

무엇보다 나혜석이 가장 사랑한 도시는 프랑스 파리였다.

일명 환락의 도시이자 박물관의 도시인 파리. 그녀는 무수한 극장과 댄싱 홀,  다양한 카페를 방문하며 망국의 땅 조선에서 느낄 수 없었던 자유와 낭만을 만끽한다. 심지어 프랑스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동거하면서 단순한 여행객에 머물지 않고 현지의 파리지엥처럼 생활한다.


그녀는 서양화가뿐만 아니라 여행자로서도 선각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그녀가 들려주는 예술 품평은 이 책의 백미이다.


서구 유럽의 회화와 조각 작품에 대한 저자의 감흥과 해설을 곁들여 있어 마치 여행기가 아니라 한 권의 서양 미술사를 공부하는 듯한 느낌이다. 아마 그 관람은 자신의 창작인생에 있어 중요한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그녀는 이 여행을 통해 조선 여성이라는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 근대 시민의 가치인 여성 참정권에 눈을 뜨고 가부장적인 조선사회에 대해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된다. 이후 남편인 김영우 이혼을 하고 두 번째 남자였던 최린과의 헤어지면서 그녀가 던진 '이혼 고백서'는 장안의 큰 충격과 화제를 몰고 왔다.

너무나 시대를 앞서 갔던 여성 선각자였지만 사랑과 자식을 잃고 예술마저 포기한 채 행려병자로 죽음을 맞이한 그녀의 삶은 안타깝다. 그녀는 남아 있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4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의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이 책과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일본인 하야시 후미코의 '도쿄에서 파리까지 삼등 여행기'를 같이 읽어도 좋다. 한창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벌어지는 이때 약 90년 전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 반기를 들었던 그녀의 선구적 삶을 반추해 보며 이 책을 통해  세계 유수의 미술작품을 만나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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