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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적인 여행자

- 정여울/사진:이승원

뛰어들고 만져보고 부딪혀보면 결국 사랑할 수밖에 없는 정여울의 여행 이야기




내가 제일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은 EBS 방송의 '세계 테마 기행'이다

평일 시간이 맞으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밤 8시 50분에 두 마리 고양이와 함께 소파에 앉아 시청한다.

하지만 대개 이 시간은 밤일하는 시간이라 142번과 144번 채널을 통해 재방송을 주로 보는 형편이다. 


정여울의 말처럼 ‘여행의 온도’가 점점 높아지는 무아지경을 맛본다.


겨울에는 독한  위스키 한 잔, 여름이면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준비하고 TV 앞에 앉으면 내 마음은 벌써 비단의 양탄자를 타고 구름 위로 날아간다.

그리고 멀고 먼 오대양 육대주의 세상만사가 안방에서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이 신기방기한 마법의 상자를 밤낮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세계 유람의 꿈을 키웠다.


뒤늦은 나이에 여권을 만들고 일 년 두 번씩 꼬박꼬박 출입국 도장을 찍는 맛으로 아시아 여러 도시의 마그네틱 냉장고 자석을 사들였다.

대개 혼자 떠나는 야간 비행의 맛이란 홍콩의 망고주스보다 더 달달하다.


TV 속 여행 프로그램은 세계의 요모조모를  시각적인 화면으로 구성하여 안방 여행의 즐거움을 제공하지만 시청자는 수동적인 자세로 보여주는 대로 따라갈 뿐이다.

반면 여행 도서는 종이와 활자 또는 사진으로 구성하여 독자의 머릿속에 상상의 세계를 구성하며 여행 독자의 능동성을 요구한다.

무엇보다 여행작가의 견문과 감상이 사진 풍경과 맞물릴 때 독자들은 당장 떠나고 싶은 매우 위험한 유혹 속에 빠져들게 된다.
'여행은 나를 끊임없이 밖으로 불러내는 주문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작가 정여울


정여울의 ‘내성적인 여행자’는 유럽 여행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여행기이다.

유럽의 36개 도시를 거닐며 풀어놓은 그녀의 이야기는 여타의 여행기보다 넓고 깊은 맛이 있다.


작가 스스로 ‘단순한 여행의 감상이 아니라 내 고민과 방황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담은 내밀한 여행기를 쓰고 싶다’고 밝혔다. 거기에 덤으로 인문 교양적인 배경 지식까지 비빔 처리하여 단순한 여행기가 아닌 유럽 도시의 백과사전을 읽는 듯한 느낌이다.


특히 ‘위대한 문학의 고향’‘세상의 모든 예술’ 편은 여행과 문학과 미술, 음악이 만나 해박한 지식 정보를 제공한다. 모두 읽고 나면 내 머릿속은 무수한 예술가들의 목소리로 부풀려 있다.


무엇보다 이 작가의 강점은 탄탄한 문장력에 있다.

사실 여행의 풍경과 자신의 느낌을 정확히 포착하여 가장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고 그 단어와 어휘를 연결하여 문장을 완성한 후 독자의 공감을 얻기란 쉽지 않은 작업이다.


나도 여행 작가의 꿈을 꾼적이 있고 아직 그 꿈의 소망이 여전하지만 

국경 밖은 여전히 멀고 떠나지 못할 이유가 더 많은 현실의 변명 앞에 이탈의 용기는 점차 소멸하고 있다.

하지만 좋은 여행기를 만나면 오래된 배낭을 찾게 된다. 떠나게 만드는 매우 치명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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