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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별의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 김남희 지음

잘 자요, 내 유일한 당신, 그리고 또 잠 못 이루는 수많은 당신들





새벽 2시.

나는 북경 후퉁을 헤매고 있었다.

구글 맵의 안내에 따라 이리저리 골목을 비틀거리며 

숙소를 찾았지만 매번 높다란 담벼락 앞이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밤.

고양이 털 같은 보드라운 부슬비가 골목길에 내리고

그곳은 지나가는 사람도 불빛도 전혀 없는 밤의 사막이었다.


베이징에서

제갈공명의 팔괘진에 빠진 걸까?

돌고 돌아도 숙소는 찾을 수 없었고 결국 현대 기계 문명인 구글맵도 

와룡선생을 이기지 못했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감은 공포감으로 번져갔고 아침까지 이 후미진 골목길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새벽 내내 

얼마나 걷고 걸었을까?

운 좋게 어느 모퉁이에서 순찰 중인 북경 공안을 만났지만

그들은 스마트 폰 게임에만 열중할 뿐 길을 잃고 헤매는 여행자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급기야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또 어쩌자고 자정 무렵에 도착하는 심야 비행기를 탔으며

북경 중심지도 아닌 변두리 그것도 다 낡아 빠진 뒷골목에 위치한 숙소를 예약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저가 항공과 숙박료가 다소 싼 중국 전통식 객잔의 문화체험과 

북경 인민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후퉁을 동시에 맛보고 싶었던 욕망 탓이었을까?


나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로 목적지도 없이 거미줄 같은 후퉁을 걷고 있을 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 새벽에 웬 떼창의 소음들이 들리다니...

나는 일단 사람 소리가 너무 반가워 급히 발걸음을 옮겨 구원의 SOS를 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북경 인민에게 숙소의 약도를 보여주었지만

그는 손사래를 치며 급히 골목길로 사라졌다.


그때

‘헤이’라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들은 외국인이었다. 자전거를 탄 두 여성이 아주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왜 그래. 무슨 일이니’라고 묻는 듯했다.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숙소 위치가 적힌 약도를 보여 주었다.

그녀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둘이서 이 동양 남자를 돕기 위한 난상토론을

벌였다. 

난 그저 그녀들의 처분만 기다렸다.


이윽고 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숙소로 전화를 걸었다. 

유창한 중국어로 몇 마디 나누더니 알았다는 듯 전화를 끊고 난 후 

내게 영어로 ‘쏼라쏼라’하며 숙소 위치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 말을 내가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내가 ‘no understand’라고 연신 불쌍한 표정을 짓자 이 두 여인은 흔쾌히 ‘follow me’라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고마워’라는 눈빛을 난사하며 강아지처럼 그녀들의 자전거를 뒤따랐다.

그녀들은 스페인 여인들이었고 친구들과 모임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새벽 3시까지 파티를 즐기는 서구 문명의 자유로운 여인들과 나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까만 골목길을 다정한 연인처럼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립무원의 후퉁에서 탈출하여 숙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너무 기쁜 나머지 

만세 삼창을 부르며 유쾌하게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그런 위험한 경험이 없었다면 나의 북경 여행은 자금성과 만리장성만 떠오를 것이다.



걷기 여행가 김남희의 ‘이 별의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일 년 365일 동안 남미를 여행한 체험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남미가 어떤 곳인가?


오랜 식민의 역사를 가진 좌우파의 격전지이며 부패와 마약이 일상화되어 있고 부자와 가난뱅이의 격차가 하늘과 땅 사이인 대륙. 그러면서 위대한 자연 유산 속에서 광란의 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그녀는 위험이 도사린 남미 12개국을 대부분 홀로 여행하며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그 옛날의 전기수처럼 들려준다.


대부분의 세상 유람기들이 먹거리와 볼거리 중심의 대형 사진들이 널브러져 있고 

감탄사형 어미로 종결되는 짧고 가벼운 문장들이 시종일관 이어지지만 

김남희의 문장에는 항상 '사람'이 있다.


관찰자 입장에서 보고 들은 것에 국한하지 않고 현지인 또는 우연히 만난 사람의 마음까지 쑤욱 들어가서 교감을 나누며 거기서 얻은 감동과 성찰의 화두를 우리에게 툭 던지며 삶과 여행의 의미를 되묻곤 한다.


일찍이 여행이 좋아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전세금을 빼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그녀는

국토 종주에서 규슈와 홋카이도, 에베레스트를 넘어 산티아고를 걸어 들어가더니 

유럽 일대를 뚜벅이 걸음 하나로 평정한 도보 여행작가이다.


그렇다고 항상 그녀의 여행이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항상 길은 위험과 공포 속으로 이어졌고 아름다운 자연 풍광 속에서도 원점 회귀의 본능과 

극도의 외로움으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녀의 책에는 지극히 예술적이며 시원시원한 사진은 없지만 길에서 얻은 작은 감동과 재미를 깔끔한 문체로 잘 전달하고 있다.

코로나 19로 봄꽃놀이도 눈치 보이는 요즘 활자와 사진으로 남미를 한 바퀴 휘돌아 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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