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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지음


나는 그 무엇보다 우선 작가였고, 그다음으로는 역시 여행자였다. 




소설가 김영하를 만난 적이 있다가 아니라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라는 일방적 추측을 해 본다. 


그는 Y대  86학번 출신이고 나는 K대 87학번이었다. 

우리는 Y와 K 대학의 운동권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추정한다면 Maybe 1988년 8월 여름, 광목천에 혈서를 쓰던 Y대 중앙 도서관 앞이나 이한열이 결코 돌아오지 못했던 교문 앞에서 전경들과 함께 치고받고 싸운 후 정신없이 되돌아오는 백양로 그 길가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은근슬쩍 짓눌린 눈으로 우연히 보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독수리 없는 독다방에서 다리를 비비 꼬고 앉아 달고도 시원한 냉커피를 한 잔 하고 있을 때 저만치 구피와 몰리가 유영하는 수족관 좌측에서 은하수 담배 하나 꼬나물고 데모를 계속해야 될지 군대를 가야 될지 고민하는 Y대의 그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헛된 말을 내뱉는 이유는 그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에서 김영하 최초의 해외여행을 자랑질하는 과정에서 언급했던 자신의 과거사에 대한 고백 때문이다. 


그 당시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스폰서가 되고 대학 학생처가 주도하여 학생회 간부 출신을 대상으로 중화인민공화국 단체 여행을 추진하자 그는 냉큼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의 현실을 직접 확인하겠다는 이상야릇한 논리를 펴며 당시 안기부 직원과 지역 경찰서 담당 경찰관과 함께 김포공항에서 중국 베이징으로 향했다.

김영하의 여행산문 '여행의 이유'


그 후 김영하는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국경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야말로 호모 비아토 르 즉 그는 여행하는 인간이었다. 나보다 한 달 정도 늦게 태어난 동생 김영하는 어릴 때부터 전라도 광주, 경남 진해, 경기도 양평과 파주 그리고 서울을 역마살이처럼 떠돌더니 결국 바람구두를 신은 랭보처럼 세계를 유람했던 것이다.


김영하는 여행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또 여행의 이유에 대해 데이비드 실즈의 말을 인용하여 “여행의 필요성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라고 언급했다. 


지리멸렬한 반복적인 인생살이 속에서 내 슬픔과 고통을 먹고 자라는 시간과 공간에서 달아나고자 하는 욕망은 그 옛날 원시시절부터 DNA로 이어진 이동의 본성이자 생존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결국 떠나지 않으면 병든 민들레처럼 말라비틀어져 메마른 흙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 여행자의 삶이다.

떠남과 돌아옴이 반복되는 여행의 순환 과정에서 우리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고 일상에서 살아가야 할 원기소를 얻는 것이다.


이 책은 여행기가 아니라 여행의 이유에 대한 산문이다. 


단 한 장의 사진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음과 모음으로 조합된 거대한 표음문자들의 행렬이 줄기차게 이어져 있다. 자기 문장에 대한 극도의 자만심이  없다면 실행 불가능한 시도이다. 

우리가 좀 더 참을 인자를 거듭 새기며 그 문장의 뒷구멍을 줄줄 따라가다 보면 킥킥거리는 웃음이 유발되고 ‘올 타구나’라는 동조의 감탄사를 연발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떠나기도 어려운 코로나 시대에 여행 타령을 한들 무슨 소용일까마는 그래도 이 책을 읽고 망상과 상상을 혼합하여 가상의 여행 오르가즘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것으로 불충분하다면 EBS 세계테마기행이나 스카이 트래블이나 ONT채널을 감상한다면 대리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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