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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 메리 앤 섀퍼, 애니 배로스 지음/신선해 옮김

독일군에게 비밀로 해야 했던 '돼지구이 파티' 때문에 생긴 이들의 모임에서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진이라는 여자 아이를 알고 있었다.

남해와 지리산 사이, 진주라는 곳의 동명고등학교 2학년 시절.

진양 서점이 있는 돗골로를 따라  다소 숨찬 걸음으로 올라가면 삼현여고가 있고 그 학교 1학년에 다녔던 진이라는 여고생을 만난 적이 있다. 


검은 비처럼 찰랑찰랑 목덜미로 흘러내리던 단발머리. 그리고 유난히 둥글고 깊었던 사슴의 눈동자를 가졌던 진이라는 아이를 좋아했다.


어느 해 빛살 문학회 시화전이 열렸던 느티나무 아래로 찾아왔던 그 아이를 처음 만났다. 키가 작고 귀여웠던 아이. 며칠 후 신경림의 갈대라는 시가 적힌 그림을 내게 보냈다.

나는 갈대처럼 울고 있을 그 아이에 대한 걱정 때문에 세상의 안과 밖에 존재하는 온갖 아름다운 언어들을 고르고 골라 편지에 적어 보냈다.

내 생애 최초의 연애편지라고 할 수 있는 그 러브 레터는 우편배달부로 자처한 친구와 그 친구의 남학생과 그 남학생의 여학생 친구. 그 여학생의 친구들의 손에서 손으로 들어가고 나가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그 아이의 책상에 도착했을 때 어린 날의 달콤한 연애가 시작되었다.

그 아이와 내가 주고받은 편지는 그때 그 나이에 갖고 있었던 세계를 담고 있었고 우리는 서로의 얼굴도 모르는 채 핑퐁게임처럼 편지를 주고받았다.




메리 앤 셰펴의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처음부터 끝까지 From과 To로 구성된 아주 특이한 편지 소설이다.


물론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도 동일한 형식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등장인물 15명이 지그재그식으로 주고받는 방대한 분량의 편지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영국과 프랑스 해협 중간에 위치한 건지 섬의 항구에서 하역꾼으로 일하는 도시라는 사내와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줄리엣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책 읽기 모임을 알게 된다. 건지 섬의 북클럽은 책 없이 살 수 없는 활자 중독자들의 자발적 모임이 아니라 독일군 몰래 돼지고기를 구워 먹다 발각이 된 그야말로 궁여지책으로 급조된 책 읽기 모임이다.


골동품을 파는 철물상 넝마주이, 술에 찌든 정신과 의사, 말더듬이 돼지치기, 사제 약을 제조하는 마녀 같은 아줌마 등. 감자구이 파이 북클럽에 참여한 회원들은 아주 평범한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독일군이 건지 섬을 점령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한 자리에 모여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직 책 만이 점령기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이었고 개인의 삶을 구제해주는 종교였다. 윌리엄 워즈워스의 소네트 한 구절로 아내를 얻고 세네카 서간집을 읽으면서 주정뱅이의 삶에서 벗어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이 소설에는 총 11명의 작가와 15권의 책 그리고 15명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북클럽에 얽힌 각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물망식으로 촘촘하게 얽히고 얽힌 수신자와 발신자 간의 서신 교환은 하나의 이야기 탑을 완성해 가는 서사의 치밀함을 과시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건지 섬에서 일어났던 독일군들의 수탈과 착취 그리고 만행은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존재를 더욱 부각하는 역사적 배경이다.

왜냐하면 독일군에게 점령을 당한 최악의 시대적 조건에서 그들은 책을 읽었고 책 속에서 위안과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작가인 메리 얀 섀퍼는 오랫동안 여러 도서관과 서점에서 일했던 독툭한 경험을 갖고 있었고 그 경험의 밑바탕이 그녀의 소설이 되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이 소설이 그녀의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이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고 조카 애니 배로스에게 맡기고 2008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소설은 2018년에 영화로 개봉되었다.

http://www.netflix.com/title/80223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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