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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캠페인

- 서스턴 클라크 지음/ 박상현 역

미국을 완전히 바꿀 뻔한 82간의 대통령 선거운동


내 일찍이 소시 시절 반장은커녕 분단장 또는 누구나 돌아가며 맡는다는 청소반장도 못해본 그러니깐 소심과 내숭으로 점철된 암되고 암된 꼬맹이에 불과했던 내가 무슨 일인지  이팔청춘을 넘겨 스무 살 이후부터 선거의 황제였다.

한때 운동권 양성소였던 문예비평 관련 동아리에서 최연소 동아리 회장에 뽑히더니 이듬해 과학생회장 선거에 입후보하여 덜컹 당선된 후 또 그 이듬해 단과대 학생회 선거에서 나보다 잘 생긴 미남자의 불같은 추격을 뿌리치고 인문대 회장에 당선.


대학 4년 만에 학생 권력의 최고봉에 오른 후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을 깨닫고 늙은 나이에 국방의 의무를 다하려 할 때 다시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서라는 만인의 부추김에 현혹되어 대학 5학년에 누추한 몸을 이끌고 다시 선거에 나서 일 년 전 한번 단과대 회장 선거에서 막짱을 뜬 잘생긴 후보를 다시 만나 참으로 질긴 악연이로쎄 연발하며 지긋이 제압을 하고 당선되었다.


내가 무슨 독립운동하는 애국지사도 아니건만 농악대에서 빌린 두루마기를 입고 교내와 강의실을 빙글빙글 돌고 밤이면 동네방네 자취방 돌아다니며 한표 한표 선거 운동을 하다가 운 좋게 지지자 학우를 만나면 아낌없이 담아 두었던 매실주, 더덕주, 도라지주 내주시어 흥청망청 얻어먹다가 다음날 몽롱한 상태에서 학생들에게 홍보 전단지도 나눠주고 선거 유세를 하기도 했다.


3전 3승. 무패의 대기록, 선거의 황제인 내가 파죽지세로 시의원, 도의원, 시장, 국회의원을 거쳐 대권까지 노릴 수 있었지만 권력에 뜻이 없고 천운을 만나지 못해 동네에서 훈장질과 책방 주인으로 살아간다.

근데 나보다 더 연전연승한 캠페인의 황제가 있었으니 바로 미국의 케네디 가문이다.


JFK 일명 존 F 케네디는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예비선거에서 27전 27승을 했으며 본선에서도 공화당의 닉슨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면서 화룡점점의 1승을 추가한다.


그런데 가문의 영광에 오점을 남긴 인물이 있었으니 JFK의 대통령 선거 총책을 맡았던  로버트 캐네디라는 인물이다. 그는 케네디 가문의 첫 번째 패배자였다.


196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예비 선거가 있었던 오리건주에서 매카시 의원에게 패배를 당한다.

하지만 1968년 대선 출마에서 그 해 6월 5일 0시 16분 LA 앰버서더 호텔에서 암살을 당할 때까지 82일간의 선거 운동은 로버트 케네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던 시기라고 평가한다.

작가 서스턴 클라크의 ‘라스트 캠페인’은 로버트 케네디의 미국을 완전히 바꿀 뻔한 82일간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로버트 케네디의 출마 이유는 ‘베트남 전쟁과 미시시피에서 목격한 사람들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당선도 중요했지만 자신의 선거 운동 기간 중 인종차별로 인한 상처와 빈곤의 문제를 치유하고자 했다.

자신이 정치적 가치와 철학이 분명한 로버트는 기존의 선거 운동 방식을 버리고 미국 사회의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였다. 정치적 화장술로 대중을 현혹하는 미디어 정치를 버리고 차별과 억압으로 상처 받은 흑인들의 검은손과 굶주린 아이들의 손을 맞잡기 위해 가장 가난한 동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방식은 정말 바보 같은 선거 운동이었다. 왜냐하면 로버트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를 찾고 투표율이 낮은 지역을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다른 경쟁자들이 고급 호텔에서 당내 중진들과 만나 선거 운동을 할 동안 그는 인디언 보호구역을 방문하고 멕시코계 미국인인 치카노의 노조 결성과 관련된 청문회에 참석하여 그들을 옹호하고 뉴욕의 할렘 지역과 미시시피주 클리블랜드 흑인 극빈 가정을 방문하며 쥐에 물려 얼굴이 상한 어린 소녀와의 만남 후 ‘도시 빈민의 대변자’로 자리 잡는다.

LA 차이나타운에서 연설 중인 로버트 케네디 그리고 앰버서더 호텔에서 승리 축하 기념 연설
흑인들은 그를 푸른 눈의 소울 브라더이라고 불렀다


결국 흑인들은 로버트의 진정성을 이해하며 ‘파란 눈의 소울 브라더’라고 불렀고  인디언들로부터는 ‘브래이브 하트’라는 이름을 얻었다.


흑인들과 빈민들은 케네디에게 열광했고 카퍼레이드를 펼치는 모든 도로로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그의 손과 얼굴, 허리 등을 만졌다. 백인 대통령 후보에게 보내는 흑인들의 지지와 믿음은 1968년 4월 4일 킹 목사가 암살 2시간 뒤 인디애나 폴리스 흑인 빈민가 연설에서 절정에 달한다.

자칫 광분한 흑인들에게 암살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그는 ‘도덕적 용기’를 가지고 미국 정치사에 넘을 명연설을 한다.


“여기 계신 흑인분들과, 킹 목사 살인이라는 부당함에서 비롯된 모든 백인에 대해 불신과 중오심을 품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는 분들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말씀은 저 또한 비슷한 감정이 든다는 겁니다. 저 역시 가족 중 한 명이 암살당했고, 그때 암살범도 백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힘든 시기를 이해하고 넘어서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실제 킹 목사 암살 뒤 119개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나 46명 사망과 2500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들이 일어났으나 케네디가 킹 목사의 죽음을 알리고 연설을 했던 인디애나폴리스에서는 단 한건의 사고도 없었다.

그러나 2개월 뒤인 6월 5일 자신의 암살을 예고하는 사건에 불과했다.

‘인종 불평등과 소수인종의 권리 박탈과 착취는 국가적인 문제’라는 케네디의 외침은 우파들을 자극했기 때문에 항상 암살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워싱턴 DC로 가는 철도에는 200만 명의 시민들이 몰려 들었다


그는 “제가 백악관으로 가는 길에 총이 있어요.” 라며 자신의 선거 운동을 “아주 천천히 진행되는 자살”이라고 평했다. 때론 까뮈의 말인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아무런 일도 아니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자신의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버트는 폭력과 재난지역으로 용기 있게 달려가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케네디가의 첫 번째 패배를 안겨 주었던 오리건주를 떠나 마침내 캘리포니아에서 승리함으로써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이 기정사실화 되었을 때 LA 앰버서더 호텔에서 22구경의 8발 총성이 울렸다.


결국 로보트는 굿사마리탄 병원에서1968년 6월 6일 오전 01시 44분에  42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로버트 케네디의 장례식


로버트를 가리켜 “무례하고 침착성이나 참을성이 없는 인물인 동시에 영리하고 단호하며 다른 사람을 고무시킬 줄 아는 사람”이라고 세간에서는 평했지만 82일 동안의  선거 운동을 거치면서 ‘진정성과 선함과 품위’가 있는 정치인으로 인정받는다.


햇빛에 그을린 피부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고 유명 시 구절의 암송, 좋은 문장을  메모하며 연설하는 것을 좋아했던 로버트 케네디.

1968년  6월 8일 21량짜리 장례 열차가 워싱턴 DC로 이동했을 때 미국인들이 보여준 추모의 행렬은 로버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무더운 토요일 오후에 200만 명이 철길로 몰려나왔다.

“인근 주택의 발코니에서 공장 지붕에 올라서거나 고물상, 공동묘지, 육교와 언덕에 손글씨로 ‘잘 가요. 바비’라는 현수막을 흔들었고  고등학교 밴드가 나팔로 진혼곡을 연주했고 어린이 야구단은 야구모자를 가슴에 얹고 묵념 자세를 취했으며 제복과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거수경례를 하거나 눈물을 흘렸다”라고 전한다.

82일 동안 ‘거대하고 신나는 모험’을 즐겼던 로버트는 정치인의 참된 자세와 태도가 무엇인지를 역설한다.

가벼운 입놀림과 중심도 원칙도 없이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작금의 정치 모리배들을 볼 때 울화통이 터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책 한 권으로 개과천선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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