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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의 밥상

- 엄경선 지음

동쪽의 바다, 물고기, 사람에 관한 이야기




나는 아주 오래 전부초 속전속결식으로 질주하는 고속버스 대신 느릿느릿 걷는 거북이의 여유로움으로 동쪽 바다로 가보고 싶었다. 


그 해 여름날의 장마철.

나는 천안에서 조치원, 조치원에서 제천, 제천에서 정동진역까지 동서를 횡단하는 기차를 타고 동해로 갔다.

충청의 들판을 가로질러 검은흙 위에서 길을 내는 지렁이처럼 꿈틀꿈틀 거리며  기차는 태백의 깊은 산속을 뚫고 육지의 동쪽 끝까지 달렸다.


깊은 숲 속에 가려진 오지 마을의 속살과 산과 강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인간의 세계라 할 수 없었다.

철길 위에서 뜨겁게 달구어진 기차가 길고 긴 암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나는 낮과 밤을 잊은 은둔자였다.

기차는 영월역을 지나자 곧바로 경사진 산 밑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산 허리를 관통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차는 강원도의 산 봉우리 사이사이를 손오공처럼 누비며 구름과 함께 날고 있었다.

차창 밖은 산 밑의 오밀조밀한 얇은 도로와 성냥갑 같은 트럭과 버스들이 자그맣게 보일 뿐이었다.

기차가 강원도 산맥을 뚫고 나오자 점차 높은 산들은 사라지고 낮은 구릉지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멀리 동쪽의 바다가 보였다.

나는 왜 이렇게 6시간이나 걸리는 느리고 느린 기차를 타고 이것에 왔을까?

나도 백석처럼 달이 밝은 밤엔 해정한 모래해변에서 달바라기를 하고 싶었을까?


백석은 그의 수필 ‘동해’에서 “산뜻한 청삿자리 위에서 전복회를 놓고 소줏잔을 거듭하는 맛은 신선이 아니면 모를 일이다”라며 “싱싱한 가자미를 얹은 회국수에 함경도식으로 담근 가자미식해”를 먹고 싶어 했다.


동쪽의 밥상은 속초에서 나고 자란 엄경선 작가의 음식, 생태 산문집이다. 작가는 “삶의 문화로서 지역 음식을 이해하고 맛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권한다”라며 이 책의 에필로그를 달았다.

이 책에서는 가자미에서 홍합죽까지 서른 가지의 물고기와 십여 가지의 동해안의 음식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동해 밥상이 바다 음식의 백미가 된 이유는 함경도 음식의 영향이 매우 크다.

옛말에 음식 하면 남쪽은 전라도, 북쪽은 함경도라 했는데 함경도 출신의 실향민들이 속초로 피란 내려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함경도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기존의 토착 음식과 버물리지면서 새로운 동쪽 밥상이 탄생했다. 지금의 함흥냉면과 아바이 순대가 대표적이다.


동쪽의 밥상이라고 하여 동해안 일대의 맛집을 찾아가는 여행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속초 토박이 출신의 작가는 발품과 손품, 귀품을 팔면서 물고기의 서식지와 생김새, 요리 방식까지 세세한 정보를 화선지 어탁과 유튜브 요리 채널을 보듯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정약용의 탐진어가와 허균의 도문대작, 가장 오래된 요리책 산가요록 등 고전 문헌을 뒤져 관련 자료를 찾았고 각종 신문과 잡지에 수록된 기록물을 찾아 수록하였다. 또한 명태잡이를 했던 집안사의 개인적 경험과 바다 바리를 했던 이웃들의 체험담이 이 책의 완성도를 높였다.


거기에 가자미를 노래한 백석의 ‘선우사’와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읊조린 류시화의 시도 함흥냉면의 고명처럼 얹었고 명태를 노래한 가수 한대수와 강산에도 입안을 씻는 후식으로 등장한다.

좌측부터 오징어회, 물회, 오징어 순대 (사진:박찬일)


생선살은 살은 국과 찌개, 알로는 명란젓, 내장은 창난젓, 눈알은 구워 술안주로 삼아 허투루 버릴 것이 없었던 명태의 이름은 수백 가지이며 명태의 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영양제를 만들었고 기름에 튀겨  애건빵을 만들었다는 기가 막힌 쓰임새는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거기에 정어리는 2차 세계대전 중 군수용 기름으로 수탈되어 일본을 흥하게 하다가 어획량이 급감하자 일본을 ㅍ망하게 한 ‘일망치’라고 부르게 된 사연도 들어보면 인간지사 새옹지마와 유사하다.


이것뿐이겠는가?

오징어의 본명은 오적어라는 사실이 자산어보에 기록돼 있다. 즉 까마귀를 잡아먹는 도적이라는 뜻이다. 바다 위에서 죽은 척 오징어 다리를 늘어뜨리고 있으면 까마귀가 먹이감인 줄 알고 달려들 때 다리로 휘감아서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이 책은 ‘물고기, 음식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속초 동아서점의 대표인 김영건 씨는 추천의 말에서 “조선시대에서부터 함경도까지, 시공간을 넘나들며 영동이라는 땅 위에 존재했던 음식들을 모조리 수집한 음식 백과사전”이라고 덧붙였다.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오면 나는 다시 동쪽 바다로 가서 속초의 난전에서 오징어회를 담은 소쿠리를 옆에 두고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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