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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만드는 일

- 윌리엄 모리스 / 정소영 옮김 


삶을 예술처럼, 예술을 삶처럼 살다간 생활사회주의자 윌리엄 모리스

나는 대학을 6년 만에 졸업할 무렵 먹고사는 생계문제가 막막하여 어찌해볼 도리도 없이 허허로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국보급 투수 선동열의 방어율과 맞먹는 별볼 일 없는 학점은 부끄럽기 짝이 없었고 국가와 사회발전에 이바지할 애국적인 기술도 능력도 없었던 20대말은 그야말로 오리가 무중한 암울한 시간이었다. 


몇 개월을 자취방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던 끝에 책 만드는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에게 출판의 꿈은 오래 전의 로망이었다.

그래서 영등포구청역 근처에 있던 서울 편집디자인 학원에 등록을 했다. 종암동에서 영등포까지 버스와 전철을 번갈아 타며 불철주야로 기술연마의 입지를 다지고 있을 때 국내 최대의 모 출판사 편집기획팀에 근무하던 한 선배의 일갈로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야! 대학도 나올 만큼 나오고 뭐 그리 쓰잘데 없이 돈 버려가며 그런 학원에 다니냐”라며 전화기를 대고 잔소리를 해 대는 통에 몇 마디 변명도 하지 못하고 기가 죽어 한 달도 다니지 못하고 그만두고 말았다.

아름다운 책을 만들겠다는 내 꿈이 모질지 못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지만 어찌어찌하다가 책 만드는 회사에 첫 취업을 했다. 지금은 미래엔이라는 출판사로 바뀐 대한교과서주식회사에 입사하여 두루두루 책 만드는 작업을 살펴볼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3권이 있다. 

켐스콧 공방의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와 얘셴덴 공방의 ‘돈키호테’와 도브스 공방의 ‘성서’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캔터베리 이야기’는 199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85억 원에 팔린 어마어마한 책이다.

이 책을 만든 캠스콧 공방은 윌리엄 모리스가 설립한 공예 제작소이다.

그는 1843년 영국에서 태어나 공예 예술가, 디자이너, 시인, 소설가, 생태보존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 다재다능의 팔방미인이었다.


그를 가리켜 “삶을 예술처럼, 세상을 예술처럼 실천하다가 산 생활사회주의자”라고 평한다.


이 ‘르네상스적인 인간’ 윌리엄 모리스는  “예술이 낳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름다운 집이라고 답하리라. 그 다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름다운 책이라고 말하리라.”라고 할 정도로 책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이 희대의 미적 광채가 빛나는 윌리엄 모리스의 책 66권을 파주 출판단지 해일리 마을의 한길 책 박물관에 가면 감상할 수 있다.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나뭇잎과 꽃 봉오리들이 반복 배치된 동일한 패턴들이 페이지 배경으로 설정하고 새로 개발한 머리글 서체는 본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며 최고의 화가들이 그린 삽화는 화첩을 보는 듯 휘황찬란하다. 이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게 배치된 레이 아웃은 너무나도 변화무상하고 창의적이라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다.



온다프레스에서 출간한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은 윌리엄 모리스의 주요 강연을 엮은 산문집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모리스의 예술관과 그 바탕이 된 사회주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수공예 중심의 생활 예술에 천착한 이유는 사회주의 사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예술관은 ‘만드는 사람에게나 쓰는 사람에게나 행복을 주는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장엄한 예술’이었다. 그는 ‘소수에 의한 소수를 위한 예술’은 단연코 거부했다.


좋은 예술은 “모두가 나눌 수 있는 좋은 것이고 모두를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테피스트리, 타일, 벽지, 가구 등 일반 민중이 생활 속에서 아름다운 경험을 만끽할 수 있는 생활 예술품들을 제작했다. 그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란 민중들의 일상적인 노동의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그 노동은 즐거운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노동의 즐거움은 사회주의 체제에서만 가능했다.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에서 벗어나 다소 여유롭게 상상하고 모방하며 창조적인 활동을 할 때 위대한 예술은 탄생하는 법이다.


결국 윌리엄 모리스는 노동계급적인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건강, 민중의 교육, 민중의 여가시간, 민중의 쾌적한 작업 환경이 주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조건이 주어졌을 때 노동계급도 예술을 향유하고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영남대 박홍규 교수의 모리스에 대한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박 교수는 교수신문 기고를 통해 “나는 노동자가 톨스토이를 읽고 베토벤을 들으며 반 고흐를 감상하면서 스스로도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며 그림을 그리는 세상을 꿈꾼다. 나는 그러한 삶과 세상을 만드는 것을 모리스가 추구한 사회주의이자 유토피아라고 본다”라며 모리스의 사상을 높이 평가했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살면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회주의 세상을 낙관적으로 전망하며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기대했던 윌리엄 모리스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책 53종 66권을 남기고 1896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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