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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봉

- 장정희 지음


내게 시는 오로지 나의 존재 증명이자 여자로서 시녀로서 소실로서 살아야 했던 내 생의 전부를 내건 발언이었고 항변이고 싸움이었던 거지요.




내 이름은 옥봉이에요.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은 숙원이었지만

‘달빛이 환히 내리비치는 연못에 맑은 봉우리가 내려앉은 모습’을  보고 나는 시를 짓고 나의 이름을 스스로 지었어요.


나는 여느 계집아이들과 달리 길쌈이나 바느질에 관심이 없었어요.

오직 서안 앞에서 시를 읽고 쓰는 것만이 세상의 모든 것이었죠.

내가 시를 지으면 귀신도 울고 갈 정도였어요.


옥봉.

그 이름은 내 생애 최초의 결정이었고 주인 된 삶을 살고자 하는 내 의지의 성명이었어요.

숙원은 차별과 굴종의 이름이었고

옥봉은 주체와 자존의 이름입니다.


그래요. 


나는 지리산 바람소리를 듣고 태어난 어미 없는 서녀였고 한 남자의 두 번째 부인인 자식 없는 소실이었습니다.서녀는 우연히 태어난 나의 운명이었고 소실은 필연적인 나의 선택이었어요.


서녀는 정실이 될 수 없고 소실은 서녀의  운명이라는 것이 사대부의 나라 조선의 현실이었어요. 나는 이것을 거부할 힘도 능력도 없었어요. 그러나 사랑하는 남편만큼은 내가 선택하고 싶었어요. 정말.


조원. 내가 선택한 남자.

당신은 내가 사랑할 만한 아름다운 남자였으며 내가 원하는 존경할 만한 남편이었습니다.

당신은 나의 시에 찬탄의 눈빛을 보냈고 공감의 날개를 달아 주었어요. 그리고 나의 미천한 재주를 사랑해주며 존중해 주었습니다.


당신은 소실에 불과한 나를 풍류의 장으로 이끌어 사대부들 앞에서 시를 짓게 했어요. 

그때 나는 더 이상 소실도 아닌 당신과 함께 시를 쓰는 한 도반이 되었죠. 

아, 정말 나는 난생처음 자유와 행복을 느꼈어요.

장정희 작가의 오설 옥봉과 경기도 파주의 이옥보의 묘


하지만 조원, 당신이 말한 그 한마디를 나는 지키지 못해 음수골 별당에서 쫓겨났습니다.  

집안에 해가 되거나 자신에게 부담되는 글을 쓰지 말라고 당부했던 당신.

그러나 나는 이 금기를 지킬 수 없었어요.

도둑으로 몰린 한 산지기 부부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모르는 체할 수 없었어요.


내 생애 처음으로 대문 밖으로 나가 비참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목도하면서 내가 깨달았던 사실은 사람은 사람에게서 사람다운 대접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나는 개떡 한 덩어리를 먹기 위해 몸부림쳤던 맹아라는 계집아이의 비루한 삶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멀리 파주에서 맨발로 달려온 여자를 보니 그때 그 성문 밖 움막이 생각이 났어요. 

도리질을 차며 몇 번이나 당신의 당부를 되뇌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나는 나의 시가 낮은 자의 입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시란 높은 자들의 풍류 놀음이 아니라 낮은 자들의 밥이 되어야 하니깐요.  그래서 파주 목사에게 줄 소장을 울부짖는 아낙네에게 써주었죠.


결국 이 일로 당신과의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여자의 말이 담장을 넘으면 안 되는 법인 가요?

세상에는 아픈 자가 지천입니다. 그 아픈 자들에게 나의 시가 닿아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이 눈보라 치는 성문 밖으로 나를 쫓아냈을 때 그래도 당신을 믿고 기다렸어요. 나를 불러주리라 믿었죠. 하지만 이불속 눈물이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과 같이 밤낮을 흘러도 당신은 부르지 않았죠.

서녀와 소실로 살아온 나의 운명. 처참하게 무너진 이내 생애.
시 만이 내 삶의 모든 것이었는데 이제 그것마저 잃고 당신을 잃고 남은 것은 추레한 몸뚱이 하나뿐.

나는 내가 죽어야만 시가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시고를 온몸에 둘러메고 왜란에 휩싸인 길을 하염없이 걷고 걸어 강둑에 서서 강물을 바라보아요.

이생의 버거움도 사라지고 죽음의 두려움도 없어요. 내가 가는 영원의 세계,

내가 죽고 시는 다시 태어나는 곳.

그래서 그 언젠가 그 누군가가 내 시를 읽고 내 생애를 이야기해 주길.


안녕, 안녕 모두에게 안녕.

내 다시 태어난다면 두 번 다시 서녀로 태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두둥실 몸을 띄워 죽음마저 스스로 선택하는 나의 기구한 삶. 이젠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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