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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의 아틀리에

- 장욱진 지음/열화당


나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나의 그림은 빛깔을 통한 내적 고백이며 내 속에서 변형된 미와 자연의 찬미이다




국민학교 시절. 

나는 그림 한 번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얼치기 실력으로 처음 출전한 소년 한국일보 주최 사생대회에서 깜짝 입선한 그림 영재였다고 하면 뭇사람들이 흰소리라 비웃겠지만 이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만일 우리 부모님이 일찍 하늘이 주신 나의 재주를 알아채시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면 지금쯤 뉴욕 어느 갤러리에서 만인을 모셔두고 개인전을 열었을 터이지만 가정사 먹고사는 문제가 힘들었던 시기라 집안 살림을 걱정한 장남의 통 큰  결단으로 일찌감치 화가에 대한 꿈을 접고 학문 수양에 정진할 수밖에 없었다.


아, 슬프다. 내 지금도 그 옛날의 열 손가 락이 건재하고 양안이 살아 있는데 어릴 적 꿈 하나 되살리지 못하고 늙어가니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미워하겠는가.

모든 것이 내 팔자다라고 생각하니 그 옛날 어느 화가 한 분이 생각이 난다.


바로 장욱진이다.

화가 장욱진과 그의 작품 자화상


화가 장욱진은 보통학교 3학년 시절 전일본소학생미전에서 단순한 도형과 선으로 이상야릇하게 생긴 까치 한 마리를 그려 1등을 차지하면서 식민지 조선 소년의 기상을 만방에 떨쳤다.


허나 장욱진 화가 역시 집안의 극심한 반대와 학교 생활의 부적응으로 방황과 방종을 거듭하다 결국 몹쓸 병을 얻어 예산 수덕사에 들어가 요양을 했다.

그때 비운의 여인 나혜석을 만나 ‘네 그림이 나보다 낫다’는 칭찬에 용기백배하여 그림에 매진한 결과 제2회 전조선 학생미술전람회에서 사장상을 받으며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해방 이후에도 서울대 교수라는 세속적인 명예와 부를 멀리하고 오직 그림 하나에만 매달려 자신을 완전히 소진하고자 했던 장욱진은 소란과 소음의 구렁텅이인 서울을 벗어나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외딴곳에서 손수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 나갔다.


경기도 덕소 12년, 충주 수안보 6년, 신갈 5년의 긴 시간 동안 외딴 아틀리에에서 고독과 고요, 새벽을 예술을 위한 축복이라 여기며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했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


그는 “그림은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이고 술은 나에게 휴식을 안겨 주는 일이다. 그림과 술과 나는 삼위일체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술은 몸의 모든 감각을 일깨워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며 이 세상에 없는 저 세상의 언어와 색깔을 가져와 이 세상에서 새로운 예술을 만든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고 그림을 그렸다.


그의 제자인 원로 조각가 최종태 선생은 “장욱진은 일본을 통해 20세기 서양미술을 접했지만 일본풍도 서양풍도 아닌 ‘천진한 형태’로 우리 민족의 얼을 담아낸 20세기 미술사의 보기 드문 사례”라고 평할 정도로 장욱진의 그림은 아주 독특했다. 

1976년에 출간된 장욱진의 그림산문집


스스로 ‘나는 심플하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미술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한 그의 화풍은 마치 초등학생이 그린 듯 유치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누구나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그림이며 우리 생활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소재들을 그려 매우 친근한 느낌을 준다. 


지인들이 ‘늙은 아이’라 부를 정도로 순진무구했던 그는 자신의 내면적 세계를 동화적 그림으로 표현해 내었던 것이다.


참새나 까치, 강아지와 나무 등 조그맣고 단순한 것들을 사랑한 장 화백은 자신의 그림을 “산만한 외부형태들을 나의 힘으로 통일시키는 일”이라며 선과 도형으로 최소한의 형태로만 사물을 형상화하여 자신만의 그림세계를 창조했다.


누구의 주문을 받거나 유행에 따라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신의 직관과 내면에 따라 그림을 그렸던 그는 그의 바람대로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하며 1990년 12월 27일 향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욱진의 그림 산문집 ‘강가의 아틀리에’는 1976년 처음 발간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던 책인데 출판사 열화당에서 다시 글과 그림을 증보하여 장욱진 탄생 100주년이었던 지난 2017년에 다시 출간했다. 

이 책에는 그의 그림과 삶에 대한 철학들이 오롯이 담겨있으며 서양화가 김환기, 조각가 김종영과 함께 한국 화단에서 빼어난 글솜씨를 자랑하는 장욱진의 글을 만나 볼 수 있다. 그리고 앙증맞은 삽화들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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