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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의 의식

-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황정임 역


대략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29년 전대미문의 계약결혼을 맺고 51년 동안의 긴 동행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부부이다.


이들은 서로 바람을 피우든 말든 다른 사람과의 애정행각에 간섭하지 말 것, 돈문제는 구차하게 서로 손 벌리지 않고 각자 알아서 할 것, 서로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 관계는 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특히 사르트르는 보부아르를 ‘자기 책의 검열관, 인쇄 허가자’로 부를 정도로 절대적인 협력자였으며 최초의 독자였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지은 ‘작별의 의식’은 사르트르와 보낸 마지막 10년, 즉1970년에서 1980년까지 사르트르의 점멸을 다루고 있다.


사르트르는 철학자이자 소설가였고 극작가였는데 문학 비평과 정치 평론 등 다양한 글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며 프랑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각종 단체의 성명서와 항의문, 호소문에 직접 서명을 하고 집회와 시위에 참여했던 ‘실천적 지식 기술자’였다.


한국과 관련해서는 시인 김지하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자 석방 호소문에 서명을 하여 그를 풀려나게 한 인연도 있다. 그야말로 사르트르는 참여하는 지식인, 앙가주망 그 자체였다.


하지만 1970년에서 1980년까지 그의 육체는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좌측 뇌의 혈액 순환 장애로 기억상실이 찾아왔고 가끔 술에 취한 듯 횡설수설하였으며 오줌이 억제되지 않는 실금으로 그의 바지는 어린아이처럼 젖어 있었다.


세계의 지성이자 실존 철학의 황제였던 사르트르의 존엄은 늙음과 질병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고 있었다.


하루에 봐야르 담배 두 갑을 피고 낮과 밤의 구분 없이 포도주와 위스키, 맥주를 번갈아 마셨던 사르트르는 종종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또한 당뇨병의 전조가 생기고 입술은 마비되고 눈은 반쯤 실명이 되고 틀니까지 끼게 되면서 ‘작가로서 직업은 완전히 망가졌고 자신의 존재 이유가 박탈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는 ‘결코 슬퍼하거나 우울해하는 때가 없이 그저 지금의 나로 적응하는 것이다’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사르트르가 각종 질환에 시달리기 시작하자 두 사람의 관계는 ‘절대적 상호 동맹관계’에서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로 전환되고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간병인 역할을 맡겨 된다. 

사르트르와의 마지막 10년을 다룬 작별의 의식, 그리고 시몬 드 보부아르


그래서 이 책은 역자의 말대로 ‘보부아르의 간병기’이기도 하다.


이런 와병 중에 사르트르가 포기하지 않았던 일은 여행과 젊은 여성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그는 보부아르와 함께 남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스 등을 여행하며 맑은 공기, 따뜻한 햇빛을 찾아다녔으며 숙소에서 보부아르가 읽어주는 책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사르트르의 여성편력은 당시에도 유명했다. 프랑수아즈 사강과의 염문은 물론 많은 여성들과 연애를 했는데 이에 대해 보부아르는 시기와 질투 섞인 감정적인 판단보다 무미건조하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뿐이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젊은 여성들과의 연애로 인해 돈이 항상 부족했다.


출판 인세와 강연 등으로 괜찮은 수입을 올렸지만 그녀들과 몇몇 지인들에게 적지 않은 생활비를 지출했기 때문에 그는 죽을 때까지 돈걱정을 했다. 급기야 병원 구급차를 부를 때는 전화 요금을 내지 않아 전화가 끊긴 상태였고 나중에는 자신의 장례비조차 걱정했을 정도였다.


그토록 집착했던 여행과 젊은 여성들은 그가 중환자실로 실려 가면서 끝이 났다. 단지 허물어진 육체로 할 수 있었던 일은 누워서 깊은 잠에 빠지는 것과 느리고 급한 호흡뿐이었다.


그는 폐수종과 욕창이 걸리고 방광 기능이 떨어지면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되자 보부아르는 담당 의사에게 ‘그가 죽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해 주세요. 불안을 갖지 않게 고통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결국 사르트르는 ‘당신을 많이 사랑하오 나의 카스토르. 해야 할 일을 했어’ 라는 말을 남기고 1980년 4월 15일 사망했다. 사르트르는 유해는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치되었고 1986년 4월 보부아르도 같은 묘석 아래에 묻히면서 함께 영면에 들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함께한 삶에 대해 ‘우리의 생이 그토록 오랫동안 일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아름답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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