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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가 있다

- 이정록 지음

사람살이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이정록의 절창



이정록은 묘한 시인이다.


이리저리 요모조모 쓱 한 번 보고는 사람의 관상을 읽어내는 용한 재주는 이내 접신한 무당마냥 술술 거침없이 내뱉는 운명의 언어들로 이어진다.


그럴 때면 깔깔거리며 웃던 농담과 재치는 일순 멈춰지고 신의 말을 전하는 메신저가 됐을 때 그의 얼굴은 스멀스멀 변한다. 


짓궂은 개구쟁이에서 박수무당으로 다시 시인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거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해 있다. 얼굴에 있는 43개의 근육이 헤쳐 모여 미세하게 서로 다른 얼굴을 보여 준다.


그와 같이 술을 먹어본 사람은 시시각각 변검술을 부리는 시인 이정록을 간혹 만나보았을 것이다. 허공에서 속삭이는 혼의 말을 받아 올 때 그는 무당이 된다. 이정록은 무당이며 시인이다. 


그는 저 세계에서 순간적으로 보내는 언어를 이 세계에서 수신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박수무당이다. 


세계 저 편에 있는 보이지 않는 풍경을 읽어 내며 허허로운 추상의 우물에서 찰나적으로 전하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세상만물을 표현하는 주술사를 우리는 시인이라 부른다.


시인 이정록은 맹물 속에서 기도문과 별과 보름달을 건질 수 있는 시를 좋아한다.


———-


맹물같이 말간 시를 쓰는 분이 좋다.


남원의 복효근과 안동의 안상학과 강화도의 함민복의 시는 냉수사발같다.


.


그나저나 포플러 이파리처럼 찬란한 맹물 시인들 중간쯤에 찌그러진 양재기를 머리에  쓰고 이정록이란 시답잖은 놈이 산다.


-맹물 중에서


시인 이정록은 자신을 앞도 뒤도 아닌 중간쯤 있는 시답잖은 놈이라  평하지만 그는 시답게 쓰기 위해 뱁새 다리를 찢어 황새 다리가 되고자 한다.


———-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 있잖여? 그게 나쁜 말이 아녀.


.


가랑이가 계속 찢어지다보면 다리는 어찌 되겄어. 당연히 황새 다리처럼 길쭉해지겄지.


.


뱁새가 황새 되는 거지. 구만리장천을 나는 붕새도 본디 뱁샛과여.


.


그러니께 만해나 손곡 이달 선생 같은 큰 시인을 따르란 말이여.


-뱁새 시인 중에서


그는 매일 매일 손가락이 찢어지도록 시를 쓰고 또 쓴다. 뱁새 시인이 황새 시인이 되기 위해 시어를 뽑아내고 행과 연을 배열하며 비유와 상징의 숲을 만든다.


시인 이정록이 간혹 시가 오지 않아 자신이 허망해지면 시어를 찍어내지 못하는 애꿎은 손가락의 톱을 깎고 있을 때 여지없이 어머니의 질책이 쏟아진다.


———-


글 쓰는 사람이


웬일로 손톱을 깍는댜?


.


글 쓰는 사람은 머리가 농토니께


긁적긁적 북북 골몰하다보면


어디 깎을 손톱이 남겠냔 말이여.


쓰는 둥 마는 둥 끼적거리려면


초장에 냅다 집어치우는 게 나아


작물이든 작문이든 손톱뿌리까지


다 닳아빠지는 일이여.


-손톱 뿌리까지 중에서


어머니의 손톱은 한창 농사일할 때 땅뙈기에 다 닳아버릴 정도였다. 작물과 작문모두 땅을 파고 뒷머리를 긁으며 손톱으로 키우고 짓는 것. 그렇게 어머니는 벼락같은 죽비를 내리치며 시인의 게으름을 질책한다.


어디 어머니의 호통 만이 시인을 키웠을까? 어머니의 칭찬과 격려는 시인을 한 마리 장어로 만들어 힘 찬 시의 바다로 나아가게 한다. ‘장허다’라는 칭찬이 장어로 언어유희되고 시인은 장어구이집에서 어머니를 찾아 부른다.


———-


어머니는 


눈곱만큼이라도 맘에 들면


장허다! 참 장허다! 머릴 쓰다듬었다.


나는 정말 한마리


힘 센 장어가 된 듯했다.


.


미끈둥한 시 한편쓰면


나는 장어구이 집에 간다.


-장어 중에서


어디 어머니만 시인을 키웠을까?


서해 바닷가에 있는 한 꼬마 선생님은 시인을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울게 만든 장본인이다.


———-


바닷가에 있는


초락초등학교에 다녀왔습니다.


.


수업을 마치고 화장실에 들렀는데


문 뒤로 아이가 숨는 게 보였습니다.


.


아이가 꼭 쥐고 있던 토막 연필을 내게 주었습니다.


.


-고맙다. 나에게 주는 거니?


-이걸로 재미난 글을 써주세요.


.


선생님, 잘 쓰겠습니다.


-꼬마 선생님 중에서


그렇게 어머니의 채찍과 꼬마 선생님의 성원에 힘 입어 이정록 시인은 열한 번째 시집 ‘그럴 때가 있다’를 출간했다. 

시인 이정록 열한 번째 시집 그럴 때가 있다
이 시집에는 햇살에 문드러지는 얼굴을 참을 수 없다는 ‘눈사람’의 앙증스러운 교태가 있고 아버지 제삿날에 엄니와 마루에 걸터앉아 뽕짝을 부르는 ‘첨작’ 이 놓여 있다. 


거기에 갓 죽은 아들과 죽은 어미가 나누는 정겨운 대화를 듣고 있으면 죽음을 대하는 시인의 특유의 능청스러움과 슬픔을 반전시키는 웃음의 미학을 느낄 수 있다.


어디 이거뿐인가?


‘젖의 쓸모’, ‘팔순’, ‘그렇고 그려’에서는 은근히 웃음꽃을 날리는 충청도 사투리의 향연이 느릿느릿하게 이어진다. ‘팔순’에서는 사타구니에 숨긴 민증을 까달라는 팔순 할멈과 젊은 버스기사가 주고받는 소박한 음담은 에로틱한 해학미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그렇고 그려’ 편에서는 ‘올챙이배처럼 창자가 복잡해도 똥구멍은 단순한 거라며 어우렁더우렁 꼴값하며 사는 것’ 이 인생이라는 이정록식 통찰은 삶에 지친 우리들에게 유쾌한 위로를 준다.


하나의 사물과 현상에서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고 조합해 내는 시적 상상력은 시인의 오랫동안 기울인 내공이다. 


돌부처 머리 위에 핀 ‘진달래 꽃’에서 낙천적인 삶을 엿볼 수 있고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 흔들릴 때 지구 편 어딘가에서 흔들리며 울고 있을 어린 소녀의 젖은 눈망울을 생각하는 ‘그럴 때가 있다’는 나비의 날갯짓으로 연결된 지구세계의 운명을 조망한다.


이처럼 이정록 시인은 화수분처럼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언어의 원석을 갈고닦아 4년 만에 총 60편을 담은 시집 ‘그럴 때가 있다’를 세상에 내놓았다. 


내면의 공간에서 하나의 언어를 찰나적으로 골라내고 정박자에 춤을 추듯 시어와 시어를 연결하며 앞으로 물결쳐 나가는 시인의 마법은 휘황찬란하다.


아직도 보살과 같은 웃음과 예민한 더듬이의 감각으로 사람과 세계를 읽고 슬픔과 눈물의 힘으로 세상을 위무하는 시인 이정록은 시가 오지 않는 날이면 오늘도 빌뱅이 언덕을 찾아 돌칼 바람을 맞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동네 놀이터에서 ‘홀로 시소에 앉아 있’거나 ‘담뱃갑 뜯어 학’을 접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선 읽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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