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선란 지음
인간과 로봇, 동물과의 우정과 환대, 공생과 공존의 이야기
8월의 하늘이 공활한데 높고 높은 구름이 길게 누워 하품을 하고 서해 바다 물이 늦여름 햇살을 따라 도시락 싸들고 소풍을 갔는지 온통 푸르고 푸른 하늘이 열렸습니다.
푸른 하늘을 보니 지상의 삶들이 지루해지고 어디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돋아 두둥실 허공을 저어 승천의 기쁨을 누리고자 발돋움을 치는데 파랑 파랑 천 개의 파랑이 책상 위에서 나불거려 이게 뭐야 하며 펼쳐 보니 재미와 감동이 물결쳐 왔습니다.
누구나 읽었다는 소설가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을 아직 읽지 않은 누군가에게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는 경주마의 등에서 천천히 떨어지며 3초 정도 허공에 머문 로봇 경마기수 콜리의 독백으로 시작합니다.
이건 이 이야기의 결말이자, 나의 최후이기도 하다
그저 하늘이 푸르다는 딴생각을 하다가 말등에서 떨어진 후 하반신이 완전히 부서진 콜리. 하지만 ‘아주 평범하지만 특별하고 용감한 인간’인 소녀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재생됩니다. 그리고 안락사가 확정된 경주마 ‘투데이’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스스로 경주마의 등에서 떨어지면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어떻게 로봇이 인간의 마음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희생과 배려의 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어쩌면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2035년에는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이 소설의 핵심 스토리는 폐기처분을 앞둔 ‘콜리’와 안락사를 앞둔 경주마 투데이. 그리고 10대 소녀와 그 소녀의 친구, 마장 관리사와 수의사 등이 의기투합하여 로봇과 동물을 구하며 인간과의 우정과 환대, 공생과 공존을 다룬 SF소설입니다.
소설의 주요 공간인 경마장은 한탕주의가 만연한 자본의 시궁창이며 속도와 경쟁만이 최고의 가치로 숭배받는 장소입니다. 여기에 동원된 경마와 경마 기수는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일회성 도구에 불과합니다.
로봇 경마 기수가 낙마하여 회생 불가능할 경우 폐기처분의 수순을 밟고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경주마는 안락사를 당하거나 말고기로 팔려 나가야 합니다. 로봇권은 고사하고 동물권도 무시당하는 미래 사회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인간 중심적인 이 행성에서 동물들은 희생양일 뿐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보여 주는 인간과 로봇, 동물 간의 우정과 연대는 작은 희망을 느끼게 합니다. 결함과 결핍을 안고 있는 그들은 서로를 보듬고 치유하며 행복을 일구어 갑니다. 만일 인간과 로봇, 동물이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지 않는다면 미래 사회는 디스토피아가 될 것입니다.
이 소설이 여러 인물들의 시점에서 입체적으로 서술되어 각자가 처한 현실의 깊이와 넓이를 짜임새 있게 보여주면서 소설의 주제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여러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주목을 받는 주인공은 경마 기수 콜리입니다. 그는 인간보다 더 예민한 감수성과 통찰력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용기도 주며 때론 삶의 지혜를 주기도 합니다.
저를 행복하게 하고 싶으시다면 당신이 행복해지면 돼요. 괜찮지 않나요?
무의미한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대화하지 않고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나요?
인간에게는 서로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기능이 있나요
너무 아프면 뛰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이미 주로에 섰으니까 그걸로 됐어요.
이런 말을 듣고 있으면 콜리가 로봇인지 인간인지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인간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공감과 위로의 언어를 언젠가 AI 로봇으로부터 들어야 될지도 모릅니다.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꾼다는 작가의 말답게 천 개의 파랑은 경마 기수 콜리와 경주마 투데이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작가 천선란은 가볍고 쉬운 문장을 번갈아 구사하며 시원시원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아주 가독성이 높은 작품입니다. 가족의 성을 하나씩 따서 필명을 삼았다는 작가는 최근 두 번째 소설집 ‘노랜드’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