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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그리고 저녁

-욘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떄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누가 그녀를 부르는 것일까?

작고 희미한 목소리가 좁은 귀청으로 들어와 뭉개진 왼쪽 머리로 절뚝거리며 걸어간다.

그 소리는 깊고 깊은 망각의 우물에서 그녀가 아는 단 한사람을 떠올리고  점점 낮고 얇은 소리로 꼬리 치며 사라져 간다. 그녀를 부르는 이 사람은 누굴까? 


그녀가 슬며시 눈을 뜨자 현란한 빛들이 야윈 몸으로 고요하게 스며들고 검버섯이 핀 손등에 둥근 빛이 모여 웅성거린다. 그를 바라보자 물속에서 얼굴을 내민 것처럼 윤곽은 흐리고 뭉개졌다. 그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놀랍게도 왼쪽 머리는 모래 구덩이처럼 함몰이 돼 있다. 


그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귓불과 빰을 부드럽게 만지고 있다. 아주 가느다란 온기가 늙고 주름진 피부 속으로 스며든다. 그 순간 그녀는 그를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짧은 생각을 해 보았지만 도무지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의 몸은 점점 허공으로 떠오르고 코와 목줄기에 튜브를 한 늙은 여자의 모습을 내려다본다. 자신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녀 자신마저 기억할 수 없다. 


점점 공중으로 올라갈수록 달짝지근한 아카시아 향이 풍겨왔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젊은 사내를 만났던 둑방 길의 꽃내음이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유일한 것, 한 사내가 먼 하늘의 빛 속에서 웃고 있었다.


무에서 무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욘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에서 말한다. 일요일 아침, 요한네스는 잠 속에서 죽었고 죽음 속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그의 혼은 매우 가볍고 맑았다. 


작가는 한 남자의 짧은 탄생과 죽음 이후의 오후를 들려준다. 그것이 아침이고 저녁이다. 태양이 가장 높이 솟아올랐던 생의 찬란함은 찰나의 시간일 뿐, 그것은 죽음으로 가는 기착지에 불과하다. 이 소설에서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요한네스는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단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할 뿐, 변함없이 일상의 습관을 반복한다.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고 딱딱한 빵을 먹는다. 자신이 아끼고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이상하리만치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에 머문 요한네스는  죽은 옛 친구 ‘페테르’의 출현에 약간 갸우뚱하지만 그를 다정하게 맞이한다. 아직 자신의 죽음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손톱은 점점 푸르스름하게 변해간다. 한평생 어부로 살아왔지만 더 이상 바다는 요한네스를 받아주지 않는다. 심지어 그의 딸마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어제처럼 오늘 아침에 일어났지만 어제가 삶이었다면 오늘은 죽음이다. 모든 것이 어제와 달랐다. 


우리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죽은 혼은 그가 즐겨 다녔던 바닷길과 숲 길을 거닐며 옛 친구를 만나고 한때 짝사랑했던 여자도 만난다. 그리고 죽은 아내 ‘에르나’도 만난다. 사랑했던 사람들의 혼이 등장하고 퇴장하며 그가 한때 살았던 이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판단할 수 없는 모호한 상태는 일요일 오후 무렵에 끝난다.


내가 자네의 제일 친한 친구였으니 자네가 저세상으로 가도록 도와야지. 옛 친구 ’페테르‘가 말한다.

그곳은 어떤 곳인가? 요한네스가 말한다.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우리가 가는 곳에는 말이란게 없다네, 우리가 가는 곳은 너도 나도 없다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 떨리며 빛이 나지 환하기도 해, 사랑하는 건 거기 다 있다네. 페테르는 말한다.


요한네스는 페테르와 배를 함께타고 요단강을 건너듯 서쪽 만으로 나아가고 이 세상의 경계를 넘어간다. 

그리고 환하게 웃고 있는 아내 ‘에르나’를 본다.


욘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은 탄생과 죽음의 이야기이다. 세속적인 성취나 불필요한 감정노출은 거의 없다. 그저 우연히 태어나 성실히 살다 죽은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 처럼 반복적인 일상을 눈부시게 사랑하며 살다 간 우리의 이야기이다.
우연한 탄생은 그 신비로움 때문에 차마 말할 수 없어 뚝뚝 끊어지는 단음절로 연결하고 죽음은 실체가 아닌 믿을 수 없는 환상의 연속이므로 끝없이 쉼표가 이어진다. 이것이 욘포세 문장의 특별함이다.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욘포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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