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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과 고양이

- 고 씨와 초원이를 아시나요?

가문비나무아래 책방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삽니다.한강과 보후밀 흐라발, 마르케스의 소설 사이를,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니체와 칸트의 고전 사이를이리저리 누비며 동서양의 고전 위를 거침없이 활보합니다.


분홍빛 혓바닥으로 탐닉하는 모습은 감히 누구도 훼방 놓을 수 없는 독서의 순간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혹적인 책을 발견하면 어김없이 볼살을 비비며 뜨거운 애정을표시합니다. 가끔은 신세계를 만난 듯 얇고 높은 긴 소리를 내뱉으며, 책방 안에 야릇한 울림을 만들기도 합니다. 급기야 고양이 두 마리가 탁자 사이를 스키선수처럼, 비탈진 활강로를 내려가듯 질주합니다. 야생 그대로의 질주 본능과 점핑 능력은 놀라울 지경입니다. 다행히도 3단 책장 위의 사진액자들과 매대 위의 책들은 그런 난리법석에도 미동조차 없습니다.


가끔 손님들은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고양이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책을 할퀴진 않나요?", "책 위에 토하진 않나요?" 하지만 아직 그런 사고는 없었습니다. 아주 얌전한 고양이입니다.


이들의 이름은 고 씨와 초원이 입니다.

그 이름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게으른 집사의 무심한 작명법일 뿐입니다. 고 씨는 말 그대로 고양이의 '고', 수놈이라 '씨'라고 붙였고 '초원'이는 초원 아파트 근처 잡초더미에서 구조해 그렇게 불리게 되었습니다.


고 씨는 2019년 3월 4일에 대전에서 입양했습니다.도도한 품종인 '노르웨이 숲'의 피가 미지근하게 흐르는 고 씨는 한 대학가 원룸에서 여대생 집사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대생 집사의 이야기를 듣자면, 고씨는 꽤나 사연 많은 묘생을 살아왔습니다. 첫 번째는 다묘 가정에서 살았는데 좀 순진하고 온순했던 고 씨는 알력다툼에서 완전히 밀려나 왕따를 당했나 봅니다. 그다음엔 밥만 챙겨주는 아줌마의 외출냥으로 전락해 골목을 떠돌았습니다. 그러다가 길고양이들에게 해코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마취 없이 중성화 수술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습니다. 얼마나 아팠을까요? 아무튼 여러 집사를 두루두루 거쳐서 제가 몇 번째 집사인지도 모를 지경입니다.


초원이는 초원 아파트 근처에서 1박 2일 동안 깊고 넓은 울음소리를 내던 새끼 고양이를, 출근길에 우연히 발견해 간신히 구조했습니다. 잡초더미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조그만 냥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엄마 냥이를 기다리다가 지쳤는지 저를 보고도 달아나지 않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순간, 초원이는 그렇게 고 씨의 동생이 되었습니다. 그날은 2019년 6월 13일이었습니다.

고 씨는 자신이 겪은 아픔과 절망을 딛고 매혹적인 미묘로 거듭나 천안에서 가장 사랑받는 고양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저와 단 둘이 있을 때는 귀털조차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도도한 녀석이지만 손님이 책방으로 들어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애교와교태를 부리며 두 얼굴의 고양이로 변신합니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고개를 살포시 45도 각도로 기울이며 손님들을 바라보면 누구든지 고 씨의 뒤통수를 만지며 '에고 이뻐라 이뻐라 이뻐라'라고 삼세 번 합창합니다. 고 씨는 손님들의 뒤꽁무니를 졸졸졸 따라다니며 연이어 에옹에옹 거립니다. 고 씨의 목소리는 마치 아기의 옹알이 같기도, 사춘기 소녀의 앙증맞은 말투 같기도 하고, 프리마돈나의 매혹적인 소리같기도 합니다.


초여름 밀밭처럼 누런 갈기머리를 휘날리며 슈퍼모델처럼 도도하게 걷는 고 씨를 보고 반하지 않을 손님은 없습니다. 필살기인 애처로운 둥근 눈빛까지 더해지면, 목석같은 사람도 심장이 녹아 '츄르'나 '캔'을 사러 밖으로 달려가고 싶어질 지경입니다.


초원이는 고 씨만큼 애교가 많진 않지만, 저와 있을 때는 아빠와 아들처럼 행동합니다. 의자에 앉아 있으면 무릎으로, 소파에 누우면 가슴팍으로 올라와 몸을 포근히 붙이고 잠이 듭니다. 초원이의 따뜻한 뱃살이 제 심장에 와닿습니다. 책상에서 노트북으로작업을 하고 있으면 나를 지키는 호위무사처럼 옆에앉아 조용히 저를 지켜보기도 합니다. 물론 손님이 들어오면 아직은 책상 밑으로 후다닥 숨어 버리지만요. 그래도 요즘은 형인 고 씨에게 애교법을 전수받았는지 손님에게 먼저 다가가 코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이제는 두 고양이 녀석들이 책방의 마스코트가 됐습니다. 책 보다 고양이를 보러 오는 손님도 많습니다. "인스타에서 고양이 보고 왔어요. 어디 있어요? " 하고 묻는 분들도 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그런 이유 하나만이라도 책방을 찾아준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고양이 녀석들과 사진만 찍고 책은 사지 않고 빈 손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괜히 녀석들에게 심술이 날 때도 있습니다. "너희들 오늘 은 츄르 없다" 같은 모진 말도 하면서요.


동네 아이들은 특히, 두 고양이를 좋아합니다. 책방 앞으로 지나가다가, 학원 가는 길에, 엄마아빠와 밥 먹으러 가는 길에, 시시때때로 책방을 들릅니다. 어떤 아이는 크레파스로 두 고양이를 그려오고, 또 손님은 사진으로 책갈피를 만들어 오기도 합니다.


벌써 두 고양이와 동고동락한 지 3년이 넘었습니다.저보다도 유명한 이 녀석들은 가문비나무아래의 홍보대사이자, 또 다른 책방지기입니다. 이제 고양이가 없는 책방은 상상할 수 없으며 제게는 둘도 없는 털북숭이 아들들입니다. 혼자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고 씨가 오른쪽 옆구리에, 초원이는 가슴팍에 자리를 잡습니다. 두 마리를 품에 안고 책을 읽고 있으면 스르륵 잠이 옵니다. 아주 행복한 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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