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남아 있는 나날

-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젊은 날의 사랑은 지나갔지만 남아 있는 날들에도 희망은 있다.


이런 남자가 있다.
영국 명문가의 저택에서 35년 동안 집사 업무를 헌신적으로 수행한 스티븐스.

집사란 사전적 의미로 "주인집에 고용되어 그 집을 맡아보는 사람"이다.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저택의 유지와 보수, 하인의 관리와 감독까지 책임져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한다. 개인의 사적 업무보다 주인 중심의 공적 업무를 우선시해야 하는 규격화된 인간 유형이며 불필요한 감정을 최대 절제하고 냉정한 태도를 잃지 않는 목석형 인간유형이다. 이 뿐 아니라 정갈한 풍모와 신사의 품격마저 갖춰야 하는 전형적인 3D 직업이다.

오랫동안 주인 달링턴 경을 모셔 온 스티븐스는 아버지 역시 집사였던 그 직업을 그대로 물려받아 어릴 때부터 반복적인 훈련과 실무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집사의 역할에 머물지 않았다.


달링턴 홀의 주인이었던 달링턴 경은 영국 외교계의 숨은 실력자였다. 자신의 고택으로 유럽의 최고 정치인과 외교 담당자들을 초대하여 세계 대전 전후 독일의 처리 방안에 대해 막후 조정자 역할을 담당했다.

이 은밀스러운 흥정과 협상의 테이블에 스티븐스는 열과 성의를 다해 충성을 다하며 주인을 위해 온 생애를 다 바쳤다. 비록 달링턴 경이 친히틀러 분자로 낙인찍히며 몰락과 동시에 고택도 미국인에게 넘어가지만 달링턴 경과 함께 한 삶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도리어

"달링턴 경을 모시며 세상이라는 바퀴의 중심축에 내가 꿈꾼 만큼 다가갈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영화 남아 있는 나날에(1993년 개봉,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출연한 스티븐슨(안소니 홉킨스), 켄턴 양(엠마 톰슨)


그리고 생애 처음 길을 나선 6일간의 여행.

오래전 동료였던 켄턴 양을 찾아 나선 여로에서 일과 사랑에 대한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집사와 총무의 관계였던 스티븐스와 켄턴. 두 사람은 때론 찰떡궁합으로 달링턴 홀을 관리하지만 때론 티격태격 말다툼도 하면서 묘한 긴장관계를 유지한다. 간혹 켄턴은 스티븐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우회적으로 드러 내지만 집사 업무에 최우선적 가치를 두고 있는 스티븐스는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한다. 설령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달링턴 홀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부적절한 관계를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후 그녀가 그에게 보낸 한 장의 편지

'남은 인생이 텅 빈 허공처럼 내 앞에 펼쳐집니다'라는 구절은 그의 여행을 결심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뒤늦게 그는 자신의 옛 마음을 확인하지만 이미 그녀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한 남자의 아내.

그는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는 집사의 품위와 아버지의 임종과 사랑의 달콤함 마저 포기한 직업적 엄격함을 보여주었다.


우직한 한 남자의 생애 첫 여행.

영국 남부의 솔즈베리, 서머싯 주 톤던, 콘월 주, 리틀 컴프턴, 웨이머스 등의 여정 속에서 달링턴 경은 비밀스럽게 추진했던 역사적 순간과 함께 일했던 켄턴 양과의 추억들을 상기한다. 1950년대 영국 소도시의 전원적 풍경과 당시 민중들의 따듯한 인심과 정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여정이 마무리되는 6일째 마지막 날. 해변가에서 우연히 만난 한 노인. 그는 이렇게 말하고 노인과 다음과 말한다.

사실 나는, 달링턴 경께 모든 걸 바쳤습니다. 내가 드려야 했던 최고의 것을 그분께 드렸지요. 그러고 나니 이제 나란 사람은 줄 것이 남지 않았구나 싶답니다.
그 나리인가 뭔가 하는 양반한테 애착이 컸던 것 같군요. 돌아 가신 지 3년째라고 했죠? 내가 볼 때 그 양반한테 너무 집착했어요.....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달링턴 홀에서 35년간 집사 역할을 한 스티븐스


웨이머스의 해변가에서 나눈 이 두 사람의 대화는 스티븐스의 살아온 삶에 대한 함축적 의미와 앞으로 살아가야 될 삶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자신의 신념과 철학에 따라 전 생애를 달려온 스티븐스. 그의 남아 있는 나날은 무엇일까?

사랑마저 잃어버리고 평생 동안 충성을 다했던 주인은 역사의 단죄를 받고 사라진 지금.

그는 다시 남은 회한과 허망의 잿더미 속에서 다시 새로운 미국인 주인을 위해 유머와 농담을 배우겠다고 다짐하며 달링턴 홀로 되돌아 간다.

결국 그에게 남아 있는 나날은 다시 꿈꾸는 날이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이 달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