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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 TV와 로봇 건담

- 도쿄 타워를 향한 도보 행진, 결코 잊지 못할 추억


여전히 바람이 불고 보슬비가 내렸다. 



후지 티브이 건물 쪽으로 걸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건물 외벽에 형형색색의 불빛이 춤을 추듯 반짝거렸다. 

도쿄 도청을 설계한 단게 겐조가 설계한 후지 TV사. 사다리꼴 모양의 중앙에 여의주를 품고 있는 특이한 건물이다. 그 유명한 은하철도 999를 제작한 후지사. 건물 입구에는 만화영화 원피스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 모형들이 관람객의 눈낄을 끌었다. 넓은 매장을 차지한 쇼핑몰에는 어린아이들의 천국이다.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가득 차다.

나는 입구 근처에서 서성거리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미 해는 완전히 진 상태였고 나는 여행책자에서 어렴풋이 본 건담을 보기 위해 다이버 시티 도쿄로 이동했다. 후지 티브이 건물에서 5분 정도 걸어가자 거의 건물 높이와 맞먹는 18미터 초대형 건담이 보무도 당당하게 서있었다. 지층에서 쏘아 올린 조명 빛과 건담 자체서 내뿜는 색채로 인해 살아 있는 듯 생동감이 느껴졌다. 

이곳 역시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마징가 제트가 서 있었다면 더 반가웠을 텐데.

건담은 금방이라고 지축을 박차고 뛰쳐나올 듯 우람한 팔다리를 자랑했다. 

이제 오다이바를 뒤편의 기억으로 남기고 다시 다이바역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이오도메역으로 이동했다.

로봇 왕국 일본, 18미터의 건담이 오다이바를 지키고 있다


다음의 여정은 레인보우 브릿지를 건너면서 결정했다. 저 멀리 보이는 붉은 철탑으로 가기로 말이다.

바로 도쿄타워이다. 지난번 삿포로에서도 나는 후지 티브 타워에 올라갔었다. 왠지 다른 도시에 오면 높은 전망대를 찾게 된다. 한 순간에 그 도시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view point이기 때문이다. 


나는 걸어 가 보기로 했다. 전철역 어디메쯤 내려야 한다는 사전 정보가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왠지 도쿄 한 복판을 걷고 싶었다. 대략 눈 대충으로 보아도 그다지 멀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전철역 밖으로 나와 직감을 나침반으로 삼아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조금씩 비가 내렸다.

조금 전 보았던 니폰 텔레비전 건물과 로열 파크 호텔 건물이 비를 머금고 죽순 마냥 우뚝 서있다. 오후의 풍경과 달리 초저녁의 경치는 고요했다. 빌딩 숲의 불빛은 조도가 낮았고 거리의 가로등은 어둠 속에 붉은 혀만 내밀고 있었다. 약간 늦은 퇴근시간인지 여기저기 직장인들이 신호등을 따라 새떼처럼 몰려다녔다. 

비가 조금씩 드세게 내렸다. 나는 밤하늘에 붉은 철탑을 확인하기 위해 수시로 고개를 들었고 그때마다 비는 내 콧등을 때렸다. 휩쓸려가는 직장인들 속에 묻혀 이리저리 흔들리며 걸어가다가 불현듯 이 길이 아닐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마치 헬멧을 쓰고 도로공사를 하고 있는 노동자에게 물었다.



"도쿄타워" "도쿄타워" 몇 번을 외쳤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입 안을 중얼거리더니 내가 이미 지나온 길을 가리키며 정반대의 방향을 일러주었다.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이 동경 낯선 곳에서 밤새도록 헤매고 다닐 뻔했다. 나는 다시 추츰추츰 온 길을 되돌아가 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낯선 사람들이 빗 속에서 물고기 떼처럼 요동치며 걷고 있었다. 나는 신호등 몇 개를 지나고 지나 이오도메역에서 로열 파크 호텔을 지나 도보를 걸었다. 도로 주변은 어두웠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도쿄 시내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여전히 나는 낯선 곳을 지나고 있었다.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가야 되는지도 모르는 채 그 누구의 동행자도 없이 나는 동경의 밤거리를 걷고 있는 것이다. 


이미 여행을 떠나며 시작된 철저한 혼자되기는 무엇을 보아야겠다는 목적 대신 그저 이유 없이 자신을 낯선 곳에 내버려 둔 채 나의 그가 어떻게 움직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혹 누가 알랴? 이 낯선 곳에서 내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불멸의 연인을 만나게 될지. 대략 30분 정도 걸었을까. 여전히 도쿄타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직감이라면 곧 나타날 것이다. 약간 외곽으로 벗어난 동경 시내 거리는 어둠 속에서도 정갈하다. 

그 흔한 담배꽁초 하나 보이지 않는다. 뒷골목의 비닐봉지와 휴지 하나 보이지 않는다.

깨끗함. 그 자체이다. 밤거리의 불빛은 화려하지 않았고 모든 불빛은 건물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윽고 한 공원으로 들어서자 중앙 통로를 따라 붉은 철탑이 젊은 남자의 성기처럼 우뚝 솟아있었다.

에펠탑을 모방한 거대한 철탑.  우주 밖으로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을까


나는 서둘러 시바 공원을 지나 도로를 건너자 드디어 프랑스의 에펠탑을 본떠 1958년 333미터의 높이와 4000톤의 철, 160개의 투광으로 이뤄진 도쿄타워를 만났다. 사실 내가 왜 도쿄타워를 가보고자 했는지 알 수는 없다. 단지 동경이니깐 하나의 상징물을 눈으로 확인하고픈 심정이었을까. 삿포로의 후지 티브 타워보다 웅장했고 더 높아 보였다. 약간 흥분된 마음으로 티켓을 구하고 안내 여성의 멘트를 들으며 올라갔다. 조금씩 조금씩 올라갈수록 내가 걸어온 길과 가로등, 높고 낮은 건물들이 보였다. 


시바 공원에서 바라본 도쿄 타워


내가 저 길을 홀로 걸어왔구나라는 생각에 동경의 일부가 된 여행자의 몸임을 실감했다.

300미터 전망대에는 이미 많은 여행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창 밖의 동경 도심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멀리 레인보우 브릿지가 실낱같은 조명에 의지한 채 한 밤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동경의 야경은 고층 빌딩들의 불빛만 보여줄 뿐 그 이상의 아름다움은 없다. 도리어 평지의 전망대에서 도쿄타워를 바라보는 풍경이 더 아름다울 것이다. 나는 비 내리는 창 밖으로 동경의 첫 방문지였던 오다이바를 바라보며 비를 맞고 있을 건담을 생각했다. 

360도를 회전하며 동경 시내 동서남북을 관람을 한 후 나는 1층으로 내려와 숙소를 가기 위해 전철역으로 향하는데 어디선가 신나는 음악소리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조조지 사찰 근처에서 나는 소리였다.

도쿄 타워에서 바라본 동경 시내. 그리고 한 여름밤의 맥주 축제


이 평일의 저녁. 불타는 금요일도 아닌데 보슬비 내리는 동경 한 복판에서 울리는 고성방가는 축제의 함성이었다. 어두운 밤인지 주변 풍경은 뚜렷하지 않았지만 오래된 나무들이 작은 숲은 이룬 중앙 공터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흥겨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사방팔방에 천막을 치고 쉴 새 없이 맥주를 마시며 중앙무대에서는 스탠딩 공연을 하듯 열광의 도가니였고 테이블에는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참으로 흥겹고 신나는 축제의 장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기업의 단체모임이라기보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야외 술판 같기도 하고 그 내막을 알 수는 없었다. 다시 시바공원 쪽으로 방향을 돌리자 전철역이 나왔다. 한 번 홍역을 치른 경험이 있는지라 이번에는 전철 노선도가 눈에 조금씩 들어왔다.  무사히 오늘 밤은 동경의 한 모퉁이에서 쉴 수 있을 것이라는 안도감은 돌아가는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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