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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파리까지 삼등 여행기

- 하야시 우미코 지음, 안은미 옮김

삼등 열차는 하나의 가족 같으니 어찌 된 일일까요? 한가로운 익살꾼이 많은 덕에 언제까지나 명랑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후미코 그녀가 도쿄를 출발하여 조선과 중국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파리로 들어간 것은 1931년의 일이다. 하늘의 길이 열리기 전 여객선과 기차를 타고 단독으로 유럽을 향해 여행을 떠난 셈이다. 

아쉽게도 여정의 길목이었던 조선의 풍경은 생략된 채 중국 창춘에서 긴 여행이 시작된다. 

만주사변과 1차 세계대전의 격변 속에서 출발한 여정은 긴장과 위험이 난무했지만 후미코는 전혀 개의치 않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었다. 

위험천만한 시베리아 횡단의 삼등 열차 안에서 그녀는 조선인, 중국인, 러시아인, 독일인 등 다양한 사람들과 음식을 나눠먹고 서툰 언어로 대화를 나누며 이민족 간의 공감대를 넓혀 간다.


그들 모두는 우연히 한 기차역에서 만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또 다른 역에서 헤어지고 마는 삼등 열차 속의 인생사지만 그것 자체도 여행의 한 부분으로서 의미가 있다.


하야시 후미코의 여권(사진 참조: 정은 문고)


그녀는 러시아로 들어서며 '육지의 바다'라고 말한 그 광활한 풍경에 매료되고 러시아인들의 음악과 문학에 대한 예술적 열정을 아주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경향도 있지만 무산자 계급의 해방을 일으킨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사회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일본의 무산자들이 연모하는 러시아가 이런 곳이었던가? 일본의 노동자 농민은 도대체 러시아의 무엇을 동경하고 있는 걸까요? 그럼에도 러시아는 프롤레타리아는 변함없이  프롤레타리아입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든 죄다 특권자는 역시 특권자입니다. 3 루블의 가치 식당에는 군인과 인텔리풍의 사람이 대다수였습니다. 복도에 서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 중에 군인이나 인텔리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노동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파리.

시베리아를 건너온 피로 때문인지 그녀는 10일 동안 우중충한 파리 하늘 아래에서 꿈속을 헤매지만 곧바로 여행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파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파리의 풍경을 감상한다.

그녀는 파리의 유명 볼거리만을 찾아다니는 관광객이 아니라 한 아파트를 월세로 빌려 파리지앵으로 살아가는 여행 생활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러 극장을 순례하며 파리 예술의 다양성을 체험하고 카페에 들러 파리인들의 생활을 엿보기도 하며 자기 자신도 파리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여 그녀가 풍족한 여행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항상 생활비는 부족했고 여행비를 충당하기 위해 기모노와 장신구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리기도 한다. 점차 그녀의 자유로운 여행은 파리 시내에서 벗어나 열차를 타고 퐁텐블로 숲을 찾아가 밀레와 루소의 화실도 구경한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봄, 몽텐블로 숲의 정경을 그렸다


그녀의 나 홀로 유럽여행이 당시로서는 대단히 화려하고 대담해 보이지만 그녀는 파리와 런던에서 계속 원고를 작성해야 했고 매우 외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완전한 만성 고독'으로 자가 진단한 그녀의 표현은 1930년대 유럽에서 겪은 한 여행자의 외로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 '숙명적인 방랑자'라고 지칭한 그녀가 일본과 조선을 거쳐 중국에서 러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횡단한 사실은 대단한 사건으로 보인다. 


더구나 세계사적 격변기 속에 이루어진 시베리아 횡단은 삼등 열차 객실의 구조와 운영 모습뿐만 아니라 같은 객실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엿볼 수 있어 여행기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현지에서 방을 빌려 밥을 해 먹고 상점에서 물건도 사며 동네 주민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여행 체험인 셈이다.

하야시 후미코는 지금으로 본다면 시대를 앞서 나간 여행자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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