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죽어가는 짐승

- 필립 로스 장편소설/정영목 옮김

시들어가는 육체, 사그라들지 않는 갈망,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이를 거부하는 욕망에 대한 노교수의 격정적 사유





죽어가는 짐승. 이 구절은 예이츠의 '비잔틴으로 가는 배에 올라'에 나오는 구절이다.


내 심장을 살라다오. 

욕망에 병들고 죽어가는 짐승에 단단히 달라붙어 

이 심장은 자기가 무엇인지 모르니


'죽어가는 짐승'은 죽어가는 노년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욕망에 병들고'의 주체는 예순을 넘은 늙은 교수이다. 그 욕망의 대상은 자신의 대학 강의를 듣고 있는 스물네 살의 가슴 풍만한 쿠바계 대학생.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은 대학교수와 여대생의 에로틱한 러브 스토리이다. 

스승과 제자 간의 사랑. 불가능한 사랑의 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사랑의 관계로 치장하기에는 나이차가 너무 많이 난다. 스물네 살과 예순 살의 노인과의 애정행각이라니. 

일찍이 한국에서는 여고생을 탐하는 노 작가의 본능적 심리를 치밀하게 다룬 박범신의 '은교'라는 작품이 있었고 그 훨씬 이전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로리타'라는 작품이 있었다. 

2018년 사망한 필립 로스(사진 출처: 뉴욕 타밈스)


주인공 '나'는 여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단지 관찰자의 입장에서 관음적으로 바라보는 소극적인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직위와 명성으로 아름다운 대상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치밀한 계획 아래 젊은 여대생을 공략하는 용의주도한 인물이다. 


특히 24살의 콘수엘라의 가슴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다. 가슴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심지어 포르노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적나라한 변태 행위들로 가득 차 있다. 어쩌면 늙은 교수가 젊음을 탐하는 것은 수컷들의 본능적인 충동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젊은 여자는 왜 이 쭈글쭈글한 늙은 아랫도리를 선택했을까.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한테 친밀한 방식으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이런 젊은 남자와 성적인 수작을 할 때는 얻을 수 없는 권위를 갖게 돼 굴복의 쾌락과 더불어 정복의 쾌락을 누리는 거지


노교수가 갖고 있는 사회적 직위와 권력. 자신의 몸을 내줌으로써 얻게 되는 정복의 쾌락과 늙은 남성에 대한 우월한 자의식. 콘수에라는 이것을 처음에는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으로 재미있게도 이 어린 여대생은 젊은 애인들에게서 얻을 수 없는 성적 만족도를 늙은 교수에게서 느낀다.

여자의 몸의 미세한 감각을 깨우는 노교수의 노련한 애무와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리드미컬하게  조율하는 피스톤 운동 등 여자의 반응을 관찰하며 자신의 본능을 통제할 수 있는  섹스의 기술은 젊은 남자들에게서 얻을 수 없는 경험 많은 늙은이만의 장점이다. 

그런데 늙은 교수는 콘수엘라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회춘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젊음과 대비된 노화된 자신의 육체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 젊음의 육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주인공.


이제 아이와 끝도 없이 벌이는 전쟁이 되었어. 아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가지지 못하는 걸까 원하는 것을 얻고 있는 순간에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있어 ---나는 쾌락을 누리지만 갈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


2009년 3월 원작소설을 영화로 만든 엘레지 


끝없는 집착과 욕망은 이별의 관계에서도 지속이 된다. 그래서 자신을 '타락한 호색가.고독한 늙은 바람둥이. 어린 여자애들을 거느리는  늙은이 집에 헤픈 여자들의 하렘을 구축한 위대한 어릿광대'라고 표현한다.


작가는 '나'라는 주인공을 통해 '죽어가는 짐승'에게도 병든 욕망이 있으며 이것을 터부시 하거나 죄악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소설 곳곳에 성 해방의 슬로건들이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나타난다. 심지어 결혼 제도와 가족에 대한 책임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아들마저 비웃고 경멸하기까지 한다.

'결혼하는 자는 교회에 몸담은 사제와 같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오직 자유 섹스만이 삶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강변한다. 결코 섹스는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누구의 말대로 늙음이 늙은이의 잘못이 아니듯이 젊은 여자를 탐하는 늙은이들을 지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소 부담스럽고 적나라한 비속어들이 등장하고 변태적인 포르노성 행위들이 야릇한 문장으로 독자들을 자극시키고 있지만 이는 섹스의 아름다움과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에 대한 탐미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결국 1인칭 독백으로 장황하게 들려주는 여대생과의 추억담은 획일적인 윤리적 잣대와 사회적 규율로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소설의 막 박지에 이르러 탐닉과 욕망의 대상이었던 콘수엘라의 풍만한 가슴은 유방암이라는 난데없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사랑의 실체를 검증받게 된다. 과연 '나'는 집착과 욕망의 포로인지 연민과 동정의 사랑인지. 진정한 사랑의 관계인지 확인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