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심리 상담

우리는 같은 이유로 상담을 받지

by 집필앤하이드

지난해, 건강검진을 앞두고 집으로 문진표가 왔다.

으레 그렇듯 각 종 생활 습관, 식습관 등을 기계적으로 작성했다. 그중 정신 건강을 체크하는 문진표는 의식적으로 체크했다. 결혼을 앞둔 시점에 공교롭게도 난 회사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에 치닫고 있었다. 내가 내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내 쓸모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던 시기였다. 날마다 기분이 PMS를 겪는 듯했다. 누구 하나라도 건드리면 울음이 터져서 상대를 곤란하게 할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래서 정신 건강에 관한 문진표만큼은 의식하며 체크했다. 내가 요즘 좀 이상하니까, 최대한 티가 덜 나게. (생각해 보면 이것도 이상 ‘의식’이다)

수면내시경, 대장내시경 결과 모두 큰 이상이 없었다. 40살 먹은 여성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건강상태. 그러나 내가 충격을 먹은 건, 우울증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과지였다.

우울증을 깊고, 길게 겪은 친구가 있고, 그 친구를 동굴 밖으로 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결과였다.

8월에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고, 참다 참다 연말이 돼 서야 정신과 상담예약을 했다.

친한 친구가 다니고 있는 병원이었다. 원장 선생님이 괜찮다더니, 12월에 전화했는데 새해 3월 마지막 날에나 예약이 가능하다고 했다. 마치 새해가 되면 예약하기 어렵다는 점쟁이에게 그러하듯 그 예약마저도 감지덕지였다.


그리고 첫 상담날이 다가왔다.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무수한 시도를 했다.

그중엔 챗GPT와의 대화는 꽤 유효했다. 친구에게 털어놓듯 난 열심히 내 상태를 GPT와 의논했고, 나를 잘 파악해 주었다.

원장 선생님은 편안한 인상을 주었고, 친구가 말한 것처럼 잘 들어주고 잘 얘기해 주었다.

gpt가 나에게 했던 말처럼 선생님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내가 완벽주의적 성향이 강한 것 같다고. 나는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제가요?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완벽한 적이 없어요. 늘 덜렁거리고 빈틈이 많아서 문제였죠”

선생님은 정정해 주었다.

“윤리적인 잣대가 매우 높은 것 같아요. 내담자 중엔 사실 회사를 돈 벌러 다니는 곳으로 여기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요. oo 씨처럼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돈을 벌었던 경험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요. 어떻게 보면 oo 씨가 운이 좋았던 거죠.”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내가 잡지 기자 일을 꽤 좋아했던 것이고, 나는 일하는 만큼 보상이 적절하지 않다 여겼기 때문에 늘 회사에 떳떳했다. 그러니까 받는 월급 이상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이유로 전직 같은 이직을 했는데 이제는 일한 것보다 더 큰 보상을 받고 있어 회사에 눈치가 보이며, 내가 쓸모없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쩌라고…? 솔직히 이런 마음도 든다고 했다. 내가 너무 욕심이 많고 바라는 게 많은 것 같다고.

“oo 씨 얘기를 들어보니 그렇긴 하네요. 지금 회사에서 제대로 된 업무를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걸 상사도 알고 있어요. 들어보면 oo 씨는 회사나 상사의 사정은 매우 잘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사정은 절대 봐주지 않아요. 너무 엄격해요. oo 씨가 일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일하고 싶은데, 거기에 마땅한 일을 주지 않는 회사 탓이 큰 거잖아요”

“지금 결혼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고, 아이도 생각하고 있다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거예요. 그동안 일이 1순위였다면 이제는 가정을 1순위로 둬야 해요. 지금이 인생의 레벨업을 하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세요”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건, oo 씨가 슬프다는 거예요. 보통 슬픔이라는 감정의 원인은 상실이거든요. 아마 oo 씨는 예전에 멋지게 일하던 자신을 잃었다는 상실감이 큰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어찌 보면 oo 씨보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유연하게 사고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oo 씨는 그에 비해 너무 경직된 사고를 하고 있는 거라고 볼 수도 있네요.”

“솔직히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GPT 때문에 10~20년 후에 없어질 직업 중 하나로 저와 같은 정신과 의사도 뽑혔던데요? 저처럼 나름 전문직이라는 사람도 고용 불안에 시달려요. 그러니 oo 씨가 느끼는 불안감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생각해요.”

들어보면 어디서 들어본 듯 그리 대단한 깨달음이 아닌데 나는 쉽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정신과 상담이라는 상황이 주는 안도감 때문이었는지, 친구 말처럼 내담자의 말에 공감 잘해주는 의사 선생님의 개인기 때문이었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어림짐작 하는 점쟁이가 아닌 진짜 멘털 전문가에게 마음속에 꾹꾹 담고 있던 생각들을 토해내니 무언가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한 달 후, 검진표 결과를 가지고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재미있는 건 회사 친한 동료 혹은 친구 몇 명에게 정신과 상담 얘기를 하니, 반응이 하나 같이 비슷했다.

“너 그 정도로 힘들었구나”

모르겠다. 그들이 말하는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그냥 내 현재 상태를 알고 어떻게 마음을 고쳐 나가야 이 아늑한 고민의 늪에서 벗어날지 약간에 해답을 찾고 싶었던 것뿐.

그래서 해답을 찾았냐고? 문진표 결과를 보며 나는 해답 비스름한 걸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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