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미안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변에 결혼한 친구들이 하나, 둘씩 아이를 낳아 엄마가 돼 가고 있는 이 나이에,
왜 저는 친구들이 아니라 그 아이에게 더 이입이 되는 것인지.
아마도 엄마가 된 경험은 없지만 누군가의 딸이 된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서른보다 마흔이 더 가까운 나이인데도
왜 엄마가 잘해준 것보다 서운하고 속상하게 한 기억만 더 선명한지,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점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엄마는 어렸을 때 우리가 썼던 일기를 들춰보는 재미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그 어린애들이, 너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문장력이 엄청 좋아. 묘사를 어쩜 그렇게 잘하는지"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혼을 내도 엄마가 냈고, 칭찬을 해도 엄마가 했죠.
사업하는 아빠와는 함께 한 시간이 별로 기억에 나지 않습니다.
엄마는 내내 가정주부였다가, IMF가 터진 이후 아빠의 사업에 함께 뛰어 들었습니다.
엄마말론 팔자에 없던 영업을 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고단해하셨지만, 보람도 느낀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 서운했던 이야기를 이제는 꽤 정돈된 말로 할 수 있습니다.
그땐 그냥 짜증내고, 울고, 화내는 방법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지만, 지금은 어린 나의 감정과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대였을 엄마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엄마, 나 5학년 때 대전 엑스포로 소풍갔는데 엄마가 단체복으로 입을 체육복 잘못 빨아서 하늘색 체육복이 쑥색이 됐었는데, 곧 졸업한다고 새로 안사줬지? 단체 사진 찾아보면 나만 튈거야. 그때 내가 얼마나 창피했는지 몰라"
"엄마, 내가 중학교 갈 때 교복 살 돈 부담 느낄까봐 일부러 나보다 훨씬 뚱뚱한 언니 교복 물려받은 거 기억해? 근데 오빠는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 할 때마다 아이비 꺼 사줬어. 나도 교복 맞춰 입고 싶었는데."
"엄마가 오빠 장 안좋아서 설사할 때마다 너무 걱정해서, 그 모습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엄마는 나한테 별로 기대 안했는데 갑자기 내가 반장, 학생회장 같은 거 해서 당황했지? 나도 알아. 나보단 오빠한테 더 기대가 컸던거"
이런 말을 할 때, 처음에 엄마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절대 아니라고.
근데 엄마가 어린시절 일기장을 보고 난 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물(?)이 나와서 그런지 인정하기 시작했어요.
최근에는 "맞아. 엄마가 그랬어. 미안해. 엄마도 잘 몰랐나봐"라면서요.
엄마의 인정과 사과에 머쓱해진 건 처음이었습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어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당황스러웠거든요.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져, 마음이 뒤숭숭할 때 점쟁이를 많이 찾아갔어요.
나의 미래는 모르겠지만, 나의 성향에 대해 잘 맞히는게 무척 신기했어요. 언젠가 어떤 점쟁이가 저를 포함한 모든 가족들의 성향을 맞히며, 건강에 대해 조언을 해줬습니다. 그 얘기를 흥미롭게 엄마에게 전달하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이런 얘기가 튀어나왔어요.
"엄마, 난 엄마가 이해되지 않을 때도 많아. 나이를 먹으면서 '엄마는 왜 그랬을까?'란 생각을 종종해. 근데 다른건 몰라도 엄마와 아빠가 우리를 위해서 늘 최선을 다했다는 건 알아"
진심이었습니다. 26살에 저를 낳아 지금 내 나이쯤 돼서 초등학생 자식을 둘 이나 키웠을 엄마는 딱 그나이만큼 성숙했을 것이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겠죠. 사춘기에 접어든 딸이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느끼는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을만큼 다사다난했을테니까요.
엄마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법을 알게 되니,
엄마도 스스로를 이해하고 인정하게 된 것 같습니다.
최근에 엄마는
너무 늦은 고백이지만, 이 말도 덧붙였어요.
"사실 엄마, 공부에 취미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