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지 뭐. 말고.
나는 적응을 꽤 잘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직장에 가서도, 낯선 여행지에 가서도, 적응력은 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대부분의 경우엔 장점이자 강점이 되지만,
연애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반복되는 상대의 패턴에 쉽게 적응하고 길들여져,
영문도 모른 채 연락이 끊기거나 어긋났을 때 적잖이 당황하고 괴로워한다.
연애할 때도 마찬가지다.
퇴근하면서 연락하는 일, 자기 전에 통화하는 일 등 내가 아니 우리가 암묵적으로 정한 규칙에 균열이 생겼을 때
오만가지 잡념에 빠져들고 이윽고 관계마저 되짚어 보곤 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우리 사이는 이대로 괜찮을까?'
피곤한 일이다.
그러니 헤어질 때 얼마나 힘들겠는가?
미련 때문인지, 사라진 습관 때문인지 슬픔은 배가 된다.
최근 그 비스름한 일이 생겼고 친구 C는 말했다.
"지금 우리 나이 때에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알아? '여차하면'이야. 여차하면 그만두고, 여차하면 다른 남자 만나고..."
그래 생각해보면 그건 꽤 쿨한 멋진 에티튜드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어쩔 수 없지'라는 말보다 새로운 대안을 찾아줄 수 있는 말이라 더 희망적이고, 또 용감하게 느껴진다. 강력한 힘이 내포돼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설사 여차하면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맥이 풀린 느낌이 들지 않는다.
포기마저도 크나큰 용기와 결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을 것 같다.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작아지는 건 나다.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맥이 풀리는 것 역시 나다.
일단 해보되, 여차하면 포기하자.
그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다. 일단 해보는 것도, 이쯤 되면 그냥 '툭' 건드리는 수준은 아닐 테니.
여차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