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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꼬투리 Apr 05. 2020

장수의 꿈

몇 살까지 살고 싶어요?

며칠 전에 본 한 미드의 주인공은 현재 31살. 

앞으로 4년을 더 노력해보고 안되면 35살에 죽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는 다섯 살배기 아들을 잃었고, 이후에 괴로워하며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산다. 

죽지 못해 사는 삶. 

얼마나 괴로우면 그런 삶을 살까?


친구들과 종종 몇 살까지 살고 싶냐고 묻곤 한다. 

시답잖은 수다에 빠지지 않은 주제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대답은 "글쎄, 너무 오래 살고 싶진 않아. 벽에 똥칠하기 전까지?" 정도다. 

최대한 나에게 주어진 천수를 누리고 살고 싶다는 답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대학교 때 이후로 10년 넘게 가장 가깝게 지내는 친구 C는 그 시절, 이런 대답을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난 당장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어"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신념을 가진 기독교 신자라서 하는 대답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으니, 내일 죽어도 그리 아쉬울 것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단, 그게 너무 고통스럽진 않았으면 좋겠다"

단서는 그거 하나뿐이었다.


그렇다면 난? 

평범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너무 오래 살고 싶진 않다는 대답을 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신을 믿는 사람으로서 무척이나 오만한 대답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생에 너무 집착하며 사는 게 그리 쿨해 보이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러다 몇 달 전, 소개팅으로 만난 공대생 S를 만나서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저는 최대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세상이 변하는 걸 살아생전에 다 보고 싶거든요.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이 제가 100살쯤 되면 엄청나게 변해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오래 살고 싶어요."

오래 살고 싶은 이유가 그동안 내가 벌어 놓은 돈을 다 쓰고 싶어서도 아니고, 더 많은 여행을 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변하는 세상을 겪고 싶다라니. 

신선했다.

뼛속까지 문과생인 나에겐 특히나 그랬다. 

당신의 오늘은 누군가가 그토록 원하던 내일이다


어렸을 때 듣던 라디오에서 지겹게 듣던 말이다. 

너무 와 닿던 말인데, 살면서 종종 그 말을 잊는다. 

천수를, 그것도 아주 건강하게 누린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

갑작스럽게 사랑한 사람을 잃은 사람에게는 그 무엇으로도 대처할 수 없는 값진 것일 텐데,

그걸 자주 잊는다.


친구 C가 요즘 자주 하는 말은

"그냥 길거리에 있는 돌멩이면 좋겠다" "저 나무면 좋겠다" "귀여운 캐릭터로 살고 싶다" 등이다.

그게 무엇이든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고, 삶의 노고를 겪지 않아도 될 무생물로 살고 싶다는 바람인 셈이다.

나 역시 일이 너무 많거나 마감이 코 앞에 닥치면 이따금씩 그런 말을 한다.

"죽지 않을 정도의 교통사고가 나면 좋겠다. 그럼 그 덕에 마감도 안 하고 쉴 수 있을 테니까"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말이다. 

물론 일상을 평범하게 누리는 이들이 얼마나 현실이 고통스러우면 하는 말이겠냐만은. 


요즘 부쩍 무병장수에 대해 생각한다. 

입 밖으로 내놓진 않지만 모두가 

사는 동안엔 건강하고 싶다는 마음,

이왕 세상에 태어났으니 누릴 수 있을 만큼 누리고 싶다는 마음,

갖고 있는 게 아닐까? 


바이러스로 느닷없이 방콕 생활을 하니 나의 일상이 더욱 소중해진다. 

누군가가 그토록 원하던 내일을 사는 오늘, 

평범하지만, 한편으론 특권과도 같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 

그 안에 내가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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