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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꼬투리 Jun 23. 2020

인상은 과학이다

겪지 않아도 알 수 있을까? 

요즘 우스갯소리로  자주 하는 말.

"인상은 과학이다"

대개는 사회 물의를 일으킨 사람의 얼굴을 보고 말한다. 

이어지는 말은 "저 사람 첫인상이 정말 안좋았어" 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믿지 않았다. 

첫느낌, 첫인상. 이건 어쩌면 한 사람을 두고 편견을 만들기 딱 좋은 말 아닌가?

첫느낌이 좋다고 끝까지 좋으리란 법도 없고,

첫인상이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두려울 땐

첫느낌, 첫인상이 꽤 그럴싸하게 들어맞을 때다. 

그런적이 몇 번 있는데, 정말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대부분은 인상이 안좋다 느끼고, 실제로 안좋은 일을 겪었으니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좋은 기억보단 나쁜 기억을 더 강렬하게 기억하듯이.


사람 볼 줄 모른다는 핀잔을 듣더라도, 난 내가 첫 느낌이나 첫 인상 따위로 한 사람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그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게 싫다. 첫 인상이 좋지 않다는 말은 대부분 인신공격처럼 그 사람의 눈빛이 어떻다, 턱이 어떻게 생겼다, 광대가 튀어나왔다 등 관상학을 배운 사람이 퍼붓는 말을 근거로 삼는다. 

사실 난 관상을 볼 줄도 모르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첫 인상이 좋지 않다고 느끼고 난 후, 그와 일이든, 관계로든 엮었을 때 안좋게 끝나는 일을 종종 겪는다. 

그러니까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첫인상 데이터가 하나씩, 하나씩 쌓인다.

그 데이터가 두툼하게 쌓일 때마다 솔직히 나는 두렵다. 

눈빛, 턱모양, 광대크기, 목소리 등으로 상대를 예단하고, 그에 따라 대응하게 될까봐. 

내가 바라는 나이든 사람의 모습과 점점 거리가 멀어질까봐. 


어린시절,

아마도 94년 미국 월드컵 때였던 것 같다. 한국이 독일전을 앞두고 있던 날, 담임선생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었다. 모두들 질 거라고 했지만, 나는 이길 것 같다고 했다. 누가 봐도 한국이 질게 뻔한 경기인데, 막연하게 아니 무모하게 승리를 점치는 나에게 선생님은 허탈하게 웃으며 이유를 물었다.

"그냥요. 기적이 일어날 지도 모르잖아요?"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3:2로 패. 

생각보다 아쉽게 한국 팀이 졌던 경기로 기억한다. 

단순하게 보면, 뻔한 결과다. 1:0이든, 3:2든 패했다는 사실은 예상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1점차'로 패할 거라고 맞히는 건 쉽지 않다. 

난 그때 처음으로 어른과 어린이의 차이를 알았다. 

경험과 데이터로 결과를 판단 짓는 건 어른,

근거 없이, 그저 기적만을 바라는 건 어린이.


30대 중반이 됐지만 난 여전히 그 기적을 믿는다. 그러니까 어른인 내가 문득 어린이가 될 때가 있다. 

뻔해보이지만 '기적'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한 기적은 어디선가 일어난다, 는 믿음.. 


그러니까 과학적으로 보이는 그, 첫인상이라는 것도 확률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나는 20년 전에 내가 그랬듯 여전히, 그 기적의 가능성을 믿을 때가 있다. 


그래서 순진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난 또 순진하지 않아서 언짢아질 때가 있다. 

(요즘 내 주변 사람에게 자주 묻는 말은 "내가 그렇게 순진해?"다. 그 정도로 신경 쓰는 말이라는 것)


나는 내가 단정짓는 그 첫인상이 종종 틀리길 바란다. 

그래서 누군가를 인상으로 평가하고 재단하지 않길 바란다. 


자꾸 내 데이터에 변수를 만들어서 

"사람은 정말 겪어봐야 안다"라는 결론으로 내 인생이 흘러가길 바란다.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람을 많이 겪어봐서, 인생을 많이 살아봐서 그 사람과 말도 섞어 보지 않고 선을 긋는 일이 없길 바란다. 


물론 여전히 나를 향해 누군가가 "인상이 좋다"고 말하면 히죽대며 좋아하고, 그 사람이 느끼는 나에 대한 호감을 계속 유지하길 바라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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