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런 날인가 보다.
유난히 힘든 날, 희한하게 비슷한 일이 반복적으로 생기는 날, 유독 특정한 감정에 푹 빠지는 날..
그런 날 하루를 마감하며 스스로에게, 혹은 친구에게 주저리주저리 나의 이야기를 하며 되뇌는 말입니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입니다.
아니, 꽤 여러 번 여러 날 반복되고 있으니 그런 ‘나날’이라는 표현이 맞겠습니다.
우울이라고 하기엔 가볍고, 쓸쓸하다고 말하기엔 밝은 그런 기분을 칭할 말을 떠올리려고 하는데 쉽지 않네요.
확실한 건 오늘은 그런 날인데다가, 특별하게도 글을 쓰고 싶은 날입니다.
마감일에 맞춰 글을 안 쓴 지 벌써 3년째 돼 가고 있습니다. 글 쓰는 것 외에도 하는 일이 많았던 직업이었는데 생각해 보면 ‘그 외에’ 일을 모두 마치고 새벽까지 오롯이 글만 쓰는 시간만큼은 그리 괴롭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왜 그토록 마감이 없이 글 쓰는 일에 거리를 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마감일자가 없어서 그런지, 친구 말처럼 완성도 있는 글을 쓰는데 이골이 났기 때문인 건지,
혹은 잡지기자 출신이라는 수식어가 부담스러웠던 건지, 원고료를 받지 않은 글은 쓰기 싫어서였던 건지..
굳이 글을 쓰기 위해 이 워드창을 켜지 않은 건 조금 자유롭고 싶어서였습니다.
해야지, 해야지 미루고 미루다 언젠가 내키면 하긴 하는 저의 성향을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했으니깐요. 그랬더니 정말로 이렇게 쓰고 싶어 지네요. 아무런 대가도, 마감일자도 없이 말이죠.
제 자신만큼 저를 잘 아는 20년 넘은 친구가 아침에 대뜸 카톡을 보내왔습니다.
남편과 아들이 있는, 버젓이 가정이 있는 친구가 모든 관계를 끊고 자신을 모르는 나라에 가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행여 자신이 용기 내 그걸 행동으로 옮긴다면 다른 사람에게 대신 얘기해 달라고. 대학교 입학한 이후 등록금과 학비를 내느라 학기 중에도 방학 중에도 언제나 일을 해야 했던 속 깊은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저 용돈벌이 하겠다고 그 친구를 따라다니며 끽해야 몇 개월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기를 반복했던 저와 달리 친구는 스스로의 인생을 그렇게 일찍부터 책임졌습니다. 결혼 후에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지금까지 육아와 친정,시댁의 대소사를 챙기먀 워킹맘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그 친구가 마흔을 앞두고 있는 지금, 번아웃이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육춘기, 심리상담, 번아웃…
그 친구의 상태를 추측하며 던진 제 말은 모두 저런 것들이었습니다. 특별한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내게 말한 건 아니고, 그저 벽에 말하듯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일 뿐이라며 친구는 행여 내가 느낄 부담을 덜어주려 애썼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침부터 마음에 큰 벽돌이 떨어진 것처럼 무거웠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주었어야 그 친구에게 위로가 됐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더 이상 네가 내 친구가 아니게 됐을 때, 갑자기 네가 사라지게 됐을 때 난 너무 괴로운 삶을 살 것 같다고 전했습니다.
나만큼 나를 잘 아는 친구라, 그 친구가 괜찮다면 진짜 괜찮다고 여겨졌던 그 마법이 반대로는 통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오후에는 94년생 경력직 대리 친구가 악성 민원을 받고 울음을 토해내는 바람에 난 서툰 위로를 했습니다. .뻔한 말이었죠.
그 사람은 작정하고 대리님한테 화를 내려고 전화한 거다, 감정 쓰레기통 역할이 필요했던 거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분풀이 상대가 필요했던 거다, 그 사람은 대리님한테 중요한 사람이 아니니 그냥 털어내라…
다행히 이 뻔하디 뻔한 위로가 대리님의 눈물을 멈추게 했습니다.
어제는 10번쯤 만난 동호회 친구가 어쩐지 연애 상담을 내가 잘할 것 같다며 대뜸 본인의 불행한 연애사를 고백했습니다. 와중에 눈물이 잔뜩 고였고요. 덩달아 저의 지난 연애도 떠올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알면서도 자꾸만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자신이 답답하고, 오랜 연인의 배신 때문에 남자를 믿기 힘들어졌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또, 뭐라도 된 것처럼 조언 따위를 내뱉었습니다. 다른 회원이 말을 끊는 바람에 우리의 연애상담은 다음을 기약하며 급하게 마무리 됐습니다. 오늘 오디션이 있다고 했는데 결과는 예상대로 좋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존대와 존칭으로 위로하는 나에게 “언니 00이라 불러주세요!”이라고 DM을 보내왔습니다. 여러 번 호칭을 생략해 달라고 말했지만 고집스럽게 지켰는데, 이름을 부르며 더 친근하게 대해 달라면서요. 이만큼 저에게 다가오는 친구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저는 호칭 생략하고 내친김에 휴대전화까지 물어봤습니다. 언제라도 연락할 수 있게 말이죠. 만족한 듯 그녀는 손가락 하트 이모티콘을 보냈습니다.
그녀의 명랑함을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저의 나날은 이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