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독이며, 파이팅 하며, 자뻑하며
아시안게임이 한창인 요즘, 몇 종목 되지는 않지만 가만히 중계를 보고 있으니
몇 주간하지 못한 테니스가 치고 싶어졌다.
플레이가 성공하지 못했을 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아쉬운 표정, 스스로도 우쭐해지는 플레이를 했을 때 나오는 파이팅, 처음과 달리 몇 백 그램은 무거워진 것 같은 땀으로 흠뻑 젖은 티셔츠, 파트너의 허슬 플레이에 나도 모르게 엄지 척하며 멋있다고 파이팅을 외치는 순간…
어디선가 봤는데 이런 순간의 기억들이 진짜 운동선수들의 멘털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실수를 하든 좋은 플레이를 하든 빨리 잊고 다음 차례를 준비해야 한다고.
그 시간에 충실해야 승리에 도움이 된다고 말이다.
말 그대로 프로 운동선수들에게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님을 되뇌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기껏해야 테니스 동호인에 불과한 내가 이렇게 비장한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으니
너무 다행이다 싶다.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직업이 됐을 때,
단점은 비단 가장 좋아하는 취미이자 잘하는 특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진실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업이 되면 거기에 몰입하느라 그 과정 하나하나를 누리는 게 어렵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그랬다.
취학 아동이 되고 나서부터 어른들에게 즐겨 들었던 말은 “나중에 커서 뭐가 될래?”였다.
거기엔 다분히 어른이 되면 어떤 직업으로 돈 벌어먹고 살래 라는 의미가 깃들여 있지만 나에게 그런 개념은 없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엄마는 나중에 네가 하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과 같다고 해석해 줬던 모양이다.
이후로 나는 줄곧 생각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뭐지?
TV와 라디오였다.
처음엔 TV였다. 나보다 5살이 많은 친척오빠가 TV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 ‘PD’라는 걸 알려줬을 때 내심 ‘저거다!’라고 외쳤다. 이후로 줄곧 어른들이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나는 PD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조금 더 구체적인 직업을 말했다. 라디오 PD.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집중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고,
그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살수 있’ 을만 한 것이 무엇인지 찾고, 찾아 결국 잡지 기자로 10년 넘게 정착했다.
10년 내내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 궁금한 것을 묻고, 많은 것을 듣고, 글로 써내는 일을 했다.
분명 즐거운 일이었지만, 나는 도무지 내가 좋아했던 TV와 영화, 책 등을 마음껏 좋아할 수 없었다.
일과 떼어 내서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TV나 영화를 볼 때도, 그것과 관련된 것을 어떤 글로 풀어낼 수 있을지, 이번달에는 어떤 연예인을 섭외해야 할지 등을 골몰하느라 바빴다. 무엇을 보고도, 좋은 이유를 마음껏 드러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내 주변에는 입만 뻥긋하면 비평가가 되는 박학다식한 선후배, 동료가 너무 많았다.
좋아하는 일을 그만두고, 그냥 좋아하는 것만 온전히 집중하는 나날이 된 지 이제 2년이 됐다.
테니스 한 게임을 끝내고 화장실 가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방금 전 게임에서 어떻게 내가 그런 플레이를 했지? 역시 난 발리를 잘하나? 스트로크는 기복은 있지만 내가 팔을 끝까지 휘두르는 걸 잊지 않는다면 최소한 아웃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방금 전에 했던 플레이는 내가 봐도 끝내줬어!
프로 선수들이 들으면 기가 찰 자화자찬의 소리가 내 안에 차고 넘쳤다.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나? 내가 프로선수라면 아마 이런 자뻑 때문에 경솔하다고 손가락질받았을 거야, 아무리 생각은 자유지만…이라는 마음이 들었으나 마음을 다시 고쳐 먹었다.
뭐 어때, 이런 ‘자뻑’ 때문에 내가 테니스를 재미있어하고, 좋아하며, 계속할 수 건데!
돈 벌어먹고사는 일이야 어쩔 수 없어도, 그 외에 많은 일에 나는 매사에 프로 운동선수처럼 살아가고 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인생을 테니스 대하듯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른 시간 안에 테니스 실력이 늘지 않아 속상한 순간에도 ‘어차피 테니스는 내 평생 운동이니까 천천히 해도 돼’라고 스스로 다독였듯이,
유난히 공이 잘 쳐지거나 파트너가 좋은 플레이를 한 순간에도 엄지 척을 내밀며 “너무 멋있다! 좋아! 나이스~ 파이팅!”이라고 외치듯이.
그리고 좋은 플레이가 많이 나오는 날에는 프로 테니스 선수가 된 듯 겉으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속으로는 오두방정을 떨며 세리머니를 하며 그렇게 매사를 즐겨야겠다고
.
인생에서도 나를 다독이고, 파이팅 해주고, 자뻑하며 그렇게 살아야겠다 다짐한다.
인생의 매 순간이 돈 벌어먹고사는 일과 맞닿아 있지 않아 다행이다. 특히 테니스가.